
대학교 여름방학 때 해남 대흥사와 땅끝 마을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광주 터미널에서 시외버스로 갈아타고 가는데 길가 곳곳의 늪에 연꽃이 만발해 있었다. 생각지도 않던 호사로 보고 가는 순간의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매년 이맘때가 되면 그 연꽃들의 기억은 여전하다. 이곳 LA에도 에코 공원이란 곳에 연꽃이 핀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보았다. 시내 중심가와 가까운 곳에 있는 공원으로 공원 안에 인공으로 커다란 연못을 파서 연을 심어 놓았다. 꽃은 많이 피지 않고 연밥과 잎만 무성하였다. 같이 간 분의 이야기에 의하면 연꽃을 솎아주고 한번씩 땅을 뒤집어서 밟아주어야 하는데 그런 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꽃이 없다고 하신다. 조금 실망은 하였지만 커다란 잎 사이로 핀 꽃들은 나의 한국에 대한 여름의 향수를 조금은 달래준 것 같았다.
이제 이곳은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었다. 해변마다 비취 파라솔 밑에는 태양을 즐기는 사람과 파도타기와 수영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캠프장마다 캠핑 차와 텐트가 즐비하며 모두들 긴 여름휴가를 즐기는 시즌이다. 이러한 긴 휴가에 비할 수는 없지만 토요일 오후에 친구들과 함께 게티 센터 뮤지엄(Getty Center Museum)을 찾았다. LA에서 서쪽으로 프리웨이를 타고 약 20분 정도 가면 갈 수 있는 곳으로 나에게는 처음이다.
1983년 석유재벌이었던 J. Paul Getty가 산타모니카 산맥의 산기슭에 91만8천 평의 땅을 사서 건축가 마이어로 하여금 설계하여 이 센터를 지었다. 뮤지엄은 해발 294미터의 산 정상에 세워졌으며 산 아래에서 전기 전차를 타고 산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산 아래 주차장에서 주차비 5달러만 내면 입장이 무료인 이곳은 전차를 타는 순간 일상생활에서 탈피하여 먼 곳으로 여행하는 기분을 충분히 준다. 약 10마일 속도로 산 능선을 타고 천천히 오르니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뮤지엄에 도착하니 뜨거운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다.
건물은 모두 이탈리아의 콜로세움이나 트레비 분수에 사용되었던 바위의 거친 면을 그대로 살린 흰 석회암으로 지어졌다. 전체 구조는 여러 동의 갤러리와 강연장, 식당 및 카페 그리고 정원으로 이루어져 마치 커다란 공원에 온 것 같았다. 건물들의 기본 구조는 원과 사각형을 사용하였고 건물과 건물을 잇는 통로는 돌기둥을 세워 마치 그리스 로마의 건축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건물 안에서도 최대한 바깥을 바라볼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바깥 전망대에서는 멀리 태평양 바다와 시내를 관망할 수 있도록 했다.
이곳은 건축뿐만 아니라 정원으로도 유명하여 전속 정원사만 해도 40명 가까이나 된다고 한다. 건물 사이 사이로 마치 계곡에서 물이 흐르는 것처럼 물이 흐르고 있어 시원함을 더해주고 계곡을 만들어 물이 흘러 마침내 그 물들이 중앙 정원에 폭포수처럼 떨어지게 하고 있다. 중앙정원은 한가운데 미로 화단을 만들고 한층 위에는 갖가지 꽃들을 심어놓아 산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원과 건물 사이에는 한창 백일홍이 피어 있어 여름을 더욱 실감하게 만들었다. 잔디밭에는 연인들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저마다 누워서 시원한 여름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좋았다.
또한 게티 박물관은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갤러리와 건축 견학에 대한 안내는 물론이고 곳곳에 식당과 카페가 있으며 심지어 맥주까지 팔고 있다. 박물관 안에는 가족실이 따로 있어 함께 게임도 즐길 수 있고 소장품의 안내도 받을 수 있다. 어린이들은 워크샵에 참가하여 실제로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심지어는 비가 오는 날이나 햇볕이 강한 날에는 우산까지도 무료로 빌려 준다.
갤러리는 전부 동서남북의 4개로 구성되어 있다. 네 개가 모두 통로로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동선을 살리고 있으며 1층에는 주로 조각과 장식미술품 등을 전시하고 2층은 모두 회화 전시실이다. 2층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햇볕이 들어와 밝게 비추는 모습에 놀라 천장을 올려보니 천장은 자연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리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나중에 안내 책자를 보니 미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관람객들이 천연 빛에서 그림을 볼 수 있도록 계절과 하루의 일조량에 맞추어 프로그램화된 컴퓨터로 빛을 조절하고 있다고 한다. 시대별로 전시된 그림은, 중세는 주로 종교화가 많았고 이후의 작품들로는 초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 뮤지엄의 창시자는 이곳을 주로 유럽의 미술만 소장하기를 원했고 그러한 분위기에 맞추어서 건물도 세웠다고 한다. 한 번쯤은 이러한 분위기에 푹 젖어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각 방마다 다른 벽면의 색깔과 크기에 다양성을 주어 자칫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그림들에 대한 지루함을 덜어주었다.
북쪽과 동쪽의 갤러리를 본 후에 우리는 맥주를 마시면서 전망대에 서서 앞이 탁 트인 로스엔젤레스 시내와 바다를 바라보면서 연신 감탄을 자아냈다. 나야말로 많은 박물관을 다녔지만 맥주를 마시면서 작품 감상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정원을 산책하고 잔디밭에 누워 파란 하늘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난 마치 고대의 어느 성을 방문한 것 같은 기분을 잠시나마 가질 수 있었다. 나만이 아니라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일 것이며, 이곳을 세운 사람도 그리고 건축한 사람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