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27일 일요일 아침, 김포의 중앙승가대학교 자비관에는 피부색과 복색이 다른 세계의 여성 불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이하 불자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400명이 정원인 대강당은 물론이고, 강당 옆 로비에 설치되어 행사를 중계하는 대형 스크린 앞에도 이미 빈자리는 없었다. 참가비를 내고 등록한 불자는 일천 명, 32개 나라 195명의 외국 불자와, 나라 안 스님 및 일반 불자가 800명을 넘었더라 했다. 행사의 안내를 맡은 150명 학인들과 일반 사찰의 자원봉사자들 150명도 보태져야 했다. 앞자리에는 이미 국내의 비구니 강원과 선원의 어른 스님들말고도, 조계종단과 승가대 소임자, 그리고 여성부, 문화관광부 등 국내 정관계 인사들이 하객으로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건물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는 출가자와 재가자가 서로 마주 보고 앉은 그림이 실려 있었다. 출가자와 재가자는 종속 관계가 아니라, 앞으로는 ‘여성 불자’라는 이름으로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갈 동반자라야 한다는 것, 그것은 이 대회가 선언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했다.
학인 스님들의 도량석에 이어 타종, 그리고 법고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자 대강당은 바로 세계인을 한자리에 모신 법당이 되었다. 티베트, 일본, 대만 등 참여국 고유의 예불 의식이 무대 위에서 차례로 올려진 뒤, 한국 대회를 주관한 전국비구니회 회장 명성 스님이 단 위로 오르셨다. “Welcome to everybody!” 대중은 함께 환호했다. 6월 27일부터 7월 5일까지, 아흐레에 걸쳐 이어질 대회의 첫날인 이 날, 점심 공양을 한 참가자 및 하객은 1,500명이 넘었었다.
개회식에 이어서 기조 연설이, 그리고 대회 이튿날부터 닷새 동안 한국과 세계의 여성 불자들, 선정 수행, 불법과 계행, 출재가자의 불교 교육과 수행, 불교 수행과 여성 문제, 참여 불교 속의 수행 등 다양한 주제로 60편이 넘는 국내외 불자들의 논문이 발표되고 그것은 진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는 국립국악원에서의 한국 전통 음악과 춤, 니르바나 교향악단의 연주, 다례 시연, 범패, 나왕케촉의 연주, 선무 등 출재가자의 불교 문화 행사가 날마다 베풀어졌다.
1987년 인도에서 결성된 뒤로, 현재 45개국 1900명 회원이 참여하고 있는 사키아디타(Sakyadhita)는 구미와 히말리안(티베트), 그리고 동남아와 동북아 불교권의 출재가 학자와 수행자를 아우르는 세계 최대의 여성 불자 협회이다. ‘세계를 하나로(Bridging)’가 주제였던 제7차 대만 대회에 이어, ‘교육과 수행’을 주제로 삼은 8차 한국 불자대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간에 국제적 규모의 불자 대회가 없지는 않았으나, ‘한국 불교사상 최대 규모의 무차법회’라 할 만한 것이었다. 한국의 전통 문화말고도, 수행의 전통과 체계적인 교육 내용으로써 ‘세계 유일의 문화재급 수행 집단’이라 할 만한 한국 비구니 승가의 면모가 세계 불자들에게 깊이와 넓이로 다가간 것이다. 사키아디타 회장 소임을 맡고 있는 까르마 렉쉬 소모 스님을 비롯하여,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인 영국인 텐진 팔모, 태국의 매친니, 대만의 쯔후이, 일본의 아오야마 순또 스님 등 각국에서 불교 발전을 책임지고 있거나 영향력 있는 분들, 또 앤 클레인 등 세계 유수 불교 학자들이 참석하여 대회를 뜻깊게 했다.
대회에 참석한 외국인 여성 불자들은 각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의 불교 현황에 대해, 그리고 해인사와 불국사 등의 사찰 문화재를 관람하고, 승려 교육 전문 기관인 중앙승가대, 그리고 석남사, 운문사, 봉녕사 등, 한국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과 교육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한 뒤의 놀라움은 컸다. 이제 그들이 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은 다시금 그 나라에서 확대 재생산될 터였다. 한국 비구니 수행 집단에 대한 연구 논문으로, 비구니 승단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따뜻한 격려와 새로운 각오의 기회로, 한국에서 제공한 포교 프로그램은 자국 내 홍법의 전범으로 쓰이게 될 터였다.
대만이나 일본, 그리고 베트남 등 몇 나라를 제외하면, 비구니 승단은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곳이 많다. 석가의 딸들 가운데서도 장형長兄이라 할 만한 한국 비구니 승단에 거는 기대치 또한 높아졌으니, 처지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곳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나 인력 지원 따위가 그것이다. 개인으로 감당할 일도, 또 그렇게 도모될 일도 아니나 이 또한 국제적 연대를 강조하는 사키아디타 회원국으로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될 책무일 터였다.
대회의 의미는 세계의 여성 불자들에게만 뜻깊게 다가간 것이 아니었다. 산중의 노스님들에게는 의욕적이고도 미래 지향적인 후학들에 대한 인식과 새로운 기대감을, 직접 간접으로 대회에 참여한 비구니 스님들에게는 긍지를 심어 준 대회였고, 문화 행사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지역민들에게는 축제의 자리였다. 보문종, 천태종, 태고종 등 국내 타종단의 고른 참여도 화합의 의미를 드높였거니와, 원불교 교무와 국내외 수녀님들도 참여하여 수행의 길에서 교리의 차이는 장애가 될 수 없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했다.
대회가 끝나는 날, ‘석가의 딸들’은 이라크 전쟁의 평화적 해결, 교육과 인권, 종교 환경이 열악한 나라에 대한 자립 프로그램 지원 등을 내용으로 삼는 10가지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다음 개최국인 말레이지아에서 2년 뒤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장마 한중간에 열린 세계적 대회, ‘부처님 가피’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더라 했다. 그러나 지난 일이라 이나마 ‘회고조’로 말하게 되는 것일 터였다. 대회를 추진했던 중앙승가대학 불교학과 교수인 본각 스님은 “두 번은 못할 일”이라고 털어 놓는다. 지난 2002년에 전국비구니회의 승인을 받고 나서 시작된 준비는 일정이 모두 끝나기까지, 그에게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낸 시간들이었다. 자원 봉사 인력을 제외하고도 5억이 넘는 예산이 필요한 거대 행사였던 만큼, 준비 기간 동안에 총무원장과 대통령, 그리고 이 일을 주관하는 비구니회의 회장 스님이 바뀐 것도 일을 더디게 했으니, 대회의 실질적인 준비 작업은 지난해 연말부터 시작된 셈이더라 했다.
원만한 행사 진행을 위한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통·번역 문제였다. 경비를 아끼려고 전문 통역사 아닌 외국어 대학원 동시통역반 학생들의 힘을 빌리기로 했으나 불교에 대해서는 준비된 것이 없어서 1월부터 불교 용어 익히는 공부부터 시작해야 했다. 해외로부터 건네지는 자료는 정확도가 떨어져 수시로 재확인 작업이 필요했고, 개회일을 보름 남겨 놓고 도착한 25편의 논문들은 이틀 반 만에 번역해 내야만 했다. 논문집이 못 나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자 그는 처소로 삼고 있는 금장사에 12명의 불교 학자들을 한데 모이게 했다. 밤을 새워 번역 논문들을 감수하고 인쇄소에 넘긴 것은 제작에 필요한 절대 시간인 사흘 전이었다.
세계 여성 불자들의 축제 한마당, 갖가지 한정된 조건 속에서 대회를 성공적으로 회향시킨 본각 스님이 사키아디타와 창립 초기부터 인연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초창에서부터 참여해 왔던 혜춘, 운월 스님의 노고가 없지 않았거니와, 박사 학위 소지 비구니 스님들의 모임인 ‘담소회’ 회원으로서 약간의 후원금을 내는 정도에 그쳤던 그가 한국에서 세계적 규모의 불자 대회를 여는 일을 맡게 된 것은 그가 현재 중앙승가대에서 운영하고 있는 ‘비구니연구소’의 실질적 역할 또는 성과 때문으로 보아도 될 듯하다. 일천칠백 년 한국 불교사에서 비구승과 함께 불법을 계승하고 수호하는 든든한 동반자였던 비구니 승단에 대한 기록 작업은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1999년에 대한매일 신문사에서 ‘근세 백년 여성 종교 지도자 명감’을 기획하면서, 당시에 안암동 중앙승가대 비구니 수행관 관장 소임을 맡고 있던 그를 찾아와 불교쪽 자료를 요청해 왔다. 지금도 그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거니와, 내놓을 만한 관련 자료란 승적부밖에 없었다. 누가 해도 해야 할 일이었으나 일을 피해 가기가 쉽지, 그것을 제 일로 삼는 것은 책임감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야기로 끝나면 전설에 머물고, 기록으로 남으면 역사로 평가받을’ 일, 궁극적으로는 한국 비구니사를 쓴다는 목표를 세우고 시작된 비구니연구소의 활동은 본각 스님과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학인 스님들의 노고로 개소 4년 만인 지난해 8월, <신문 기사로 본 한국 근현대 비구니 자료집>(6권)과 <비구니와 여성 불교>(6권)로 그 결실을 보았다. 1896년부터 2000년까지의 신문과 잡지에 실려 있는 비구니 관련 기사와 관련 설화, 그리고 비구니와 여성 불교 관련 논문 및 교양 논문 500여 편을 집대성한 것이다. 모례의 누이인 사 씨와 묘법 비구니《삼국유사》로 시작될, 그가 주도할 한국 비구니사 편찬 작업은 이제 비로소 그 첫발걸음을 뗀 셈이다. 대학 내에서 공간은 제공받고 있으나 아직 정식 인가도 나지 않은 비구니연구소, 열악한 재정 등의 악조건을 뛰어넘고, 오로지 그와 학인 스님들의 열정의 산물이라 할 만한 이것은, 비구니사뿐만 아니라 인접 분야 연구 작업의 든든한 밑자료가 되어 줄 터였다. 적게는 300명, 많게는 500명, 그 동안에 발로 뛰어 듣고 모은 비구니 스님들의 행장기가 곧 책으로 묶이어 나올 예정이고, 이어서 고문서, 금석문, 사찰 단위 기록물, 비구니 관련 문학 작품 등을 한데 묶는 작업도 현재 진행 중이라고 했다.
“세 살 때에 절로 들어온 우리 본각이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왔지.”
대회장에서 어느 노스님은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 주었었다. 세 살이라면 얼굴에 윤곽이 채 떠오르기도 전이다. 장남인 천제 스님(성철 스님 맏상좌)을 비롯하여, 여섯 남매와 형제가 한 사람의 낙오 없이 모두 출가의 복을 지은 장한 집안이다. 산문 안 가르침대로 서로 내왕은 없이 지내는 편이나, 일찍이 두 손가락을 연비하여 불법에 대한 뜨거운 단심을 확인했던 큰언니 혜근 스님은 이 대회의 원만한 회향을 위해 꼬박 3년을 능엄주 기도를 지어바쳤더라 했다. 어릴 적부터 책 보는 일로 날밤을 새우곤 했다는 그가, 그래서 대학을 졸업한 뒤로 9년간의 일본 유학 끝에 박사 학위를 따낸 것이 온전히 그의 공인 줄로만 알았더니… 드러나는 장한 꽃 한송이를 피워 낸 것은 땅이며 물이며 햇살이었다.
그이 또한 한 송이 싸타르마 푼다리카(백련)보다는 아바탐사카, 곧 ‘동산에 함께 어우러져 핀 온갖 꽃들’이 함께 귀하다 했다. 간화선이나 위빠사나가 강을 건너는 ‘뗏목’일 뿐, 방법이 다르다고 서로를 폄하하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방법은 무엇이 되든 그 목적은 길 끝에서 함께 성불하는 것일 터였다. 세계인이 색색으로 함께 짜야 할 불법의 노끈 속에서, 지금은 한국 불교라는 색실 하나를 또렷하게 마련할 시점이라고 말하는데 전화가 따르릉 왔다.
스님은 객에게 웃으며 가만히 물었다. 전화, 받을까요, 말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꽃과도 같은 환한 깨우침이 객을 찾아왔다. 쉽지 않았을 이 대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끌어간 것은, 저렇듯 부드럽고도, 또 한편으로는 강한 ‘모성’이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