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대-지옥 같은 현실생활. 모두가 부러워하는 이 꽃다운 나이에 나는 왜 그렇게 모든 게 고통스러웠는지 모르겠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고, 남들을 보면 다 잘돼 보이고,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평생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피부병에, 심한 보호본능으로 폐쇄적 성격까지… 남들은 다 그런다, 넌 문제 될 게 뭐가 있냐고. ‘친구 같은 엄마 있고, 능력있는 아빠있고,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고, 네가 부럽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밤에 혼자서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현실에서 한번 해방되어 보고 싶었고,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풀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이 수련회에 기대를 걸었다.
설렘-새로운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은 항상 가슴 설레는 일이다. 나는 절에 갈 기회가 많이 없어서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엔 일주문을 들어설 때도 그림들이 너무 무시무시하여 빙 둘러 들어가곤 했다. 하지만 한 스님이 쓴 책을 읽고 불교에 관한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새로운 곳에 들어간다는 것이 두렵긴 하지만, 그 호기심을 너무 충족시키고 싶었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절로 들어섰다.
경악-모든 걸 호기심에 무턱대고 덤벼들 건 아닌가 보다.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화장실. 절에는 들어섰지만, 오리엔테이션을 하기 전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갔다가 놀라서 그만 일도 못 보고 뛰어왔다. 하늘이 노래졌다. 앞으로 어떻게 생활을 해야 할지. 역시 새로운 경험은 충격을 먹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어색함-스님들께서 얘기하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전에 스님들이 말하는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좋아하는 딱 달라붙는 바지와 화려한 색의 옷, 그리고 귀걸이, 목걸이는 회색의 법복으로 바꿔 입음으로 인해, 그 의미가 모두 상실되어 버렸고, 남은건 내 몸뚱이 하나와 순수한 마음뿐이었다. 왜 그리도 내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목탁소리, 경 읽는 소리, 그리고 절하는 것까지, 모든 게 어색했다.
분노-행동에 제약이 너무 많았다. 자유 분방한 성격의 나는 이러한 제약을 따라야 한다는 데 심하게 화가 났고, 모든 기대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억울하게 혼이 났을 때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한다는 데에 또 화가 났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도 내 마음을 몰라줬다. 모두가 미워졌고 홀로 남겨졌다.
혼란스러움-새로운 경험으로 인한 충격과 분노는 내가 걸었던 기대와 믿음에 혼란을 가중시켰고, 현실생활에 대한 그리움이 자꾸만 커져갔다. 햇빛을 보고 싶어서 나갔는데, 비가 온다면 다시 들어와야 하는 게 아닌지.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참을 것인지, 그냥 나를 생각하여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갈등했다.
포기-갈등은 하고 있어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어쩔 수 없이 규율을 지키다 보니, 그냥 자포자기하고 규율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어쩌면 겸손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만약 갈등이 스님들에 대한 반항에서 출발한 것이었다면 끝까지 남아 있는 게 승리하는 거라 생각했다.
인내-참고 또 참았다. 평소 집에서 머리카락 하나 떨어진 것도 못 보는 나에게 비위에 상하는 일들은 너무 많았다. 발우공양을 하며 설거지한 물을 마셔야 한다는 거, 딱딱한 바닥에서 자야 하는 거, 땀냄새 나는 옷을 입고 24시간을 지내야 한다는 거, 남이 신던 고무신을 신어야 하는 거. 할말도 너무 많았고, 먹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고, 손도 마구 흔들고 싶었고, 딱 달라붙는 청바지도 너무 입고 싶었다. 절하는 것도 너무 힘들고, 앉아 있어도 무릎이 내내 아팠고. 며칠 밤이 남았는지 손가락으로 꼽아보고 또 꼽아보았다. 그냥 쓰러지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니…….
이해-어느 날 갑자기 스님들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보여졌다. 세상엔 이렇게 겸손하게 그리고 힘들어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구나. 내가 너무 경계했던 건 아닐까, 말 안 듣는 우리를 가르치느라 얼마나 고생일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현실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것도 스님이 우리의 고통을 대신 업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사랑-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다. 암자로 가는 작은 오솔길도, 초록빛 나무들도, 절 마당도, 독경소리, 애절하게 들리는 법고소리도, 그리고 무시무시한 해우소까지. 처음에 느껴지던 어색함은 온데간데없어졌고, 내 마음속에 사랑의 감정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아쉬움-떠날 시간이 다 되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 스님들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쉬웠고, 이 아름다운 절을 떠난다니 더 없이 슬퍼졌다. 이러한 감정의 변화를 겪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그러면 이런 슬픈 마음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옆에 있어도 말 한번 못해본 도반도 있고, 법고 치는 멋진 스님들의 모습도 더 보고 싶고, 특강도 더 듣고 싶고, 1080배도 한번 더 해보고 싶고, 패기있는 모습의 무성 스님, 맑은 눈동자의 현오 스님, 친절한 보우 스님등등….
슬픔-하산하는데 비가 주르륵 내렸다. 그리고 내 마음의 눈물도 한없이 흘러내렸다. 왜 그렇게 마음이 슬퍼졌는지 모르겠다. 나는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고, 얻고자 하는 것도 충분히 다 얻었다. 근데 슬픔이 이런 기쁨과 함께 들어와 내 맘속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 마음 아픈 수련회는 또다시 오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이 나를 그렇게 매정하게 행동하도록 놔 두지는 않을 것 같다. 나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힘들게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을 생각하며 앞으로는 나에게 다가오는 고통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