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종하고 싶어서 찾아간 곳이었습니다. 나날이 어지러워지고 오만해지는 마음을 끊고 싶었습니다.
해인사로 떠나는 날 아침. 졸리는 몸을 이끌고 깨어나는 괴로움 속에 깨달았습니다. “내가 없으면 고통도 없구나. 고통을 느낄 나라는 것이 없을 테니.” 이것이 수련회 내내 저를 이끈 화두의 시작이었습니다.
묵언은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감사한 일인지 알게 해주었습니다. 계곡으로 포행을 갔을 때 묵언이 풀려서 친구와 말을 할 수 있었던 행복함이란! 그리고 말이라는 것이 없이도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묵언 속에서도 말이 있었습니다.
1080배. 처음에는 열심히 하면 할 수 있겠지 하는 자만심. 그렇지만 결국 내가 얼마나 작고 약한 것인지, 하나님과 부처님 앞에 철저하게 무너지고 무릎 꿇게 되었습니다. 일 배 또 일 배,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하며 괴로워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어이가 없어서 허탈한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이 무거운 몸뚱이가 남의 것이 아닌 나의 몸이라는 스님들의 말씀. 비웃는 표정의 내 수건. 어서 일어나서 도반들과 함께 하라는 꾸짖음. 내가 한 악한 일들은 모두, 다름 아닌 내가 갚아야 하는 것이구나라는 인과응보의 철저한 깨달음 속에 무성 스님의 죽비소리에 맞추어 마지막 108배에 들어갔습니다. 이 108배 만은 중간에 쉬지 않고 온전히 마치도록 해주세요라는 기도와 함께.
당일날 아침 산행길에서 생각했습니다. 마음…… 우리는 태어날 때 그 자체로서 완전한 본마음을 타고 나지만 어린아이로서는 그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도, 드러낼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본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본심이 아닌 것들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언어와 같은 것들.
마음을 끊고 버리려고 했습니다. 하나의 마음을 버리고 두개의 마음을 버리고 셋의 마음을 버리고……오늘 마주했던 혜암 스님의 사리. 사리는 왜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결국 모든 것을 얻고 그런 후에 모든 것을 버리신 분의 마음의 흔적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나도 하나의 마음을 얻고 버리고, 둘의 마음을 얻고 버리고……. 이렇게 1080배의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마지막 108배는 그래서인지 하나하나가 아깝고 아쉬웠습니다. 조금만 더 해보면 더 많은 것을 얻고 버리고, 그래서 결국 더 깨끗하고 맑은 본질의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1080배가 끝난 후 귀도 들리지 않고 다리는 후들후들. 굽혀지지도 않고 젓가락처럼 뻣뻣하여 내 다리가 아닌 듯했습니다. 눈을 돌려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푸른 나무로 이룬 산과 비에 젖어 짙은 흑색으로 올려진 기와지붕. 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 어떤 카메라로나 필터로도 잡아낼 수 없는 산사와 나무 그리고 바람의 색까지도 보였습니다. 이렇게 나를 비우고 세상을 오롯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절 할 수 있었음에 너무나도 너무나도 감사했습니다. 수련회 내내 그리고 1080배 내내도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했었지만 1080배가 끝난 후에 하늘은 확 개어 있었습니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푸르른 하늘이 얼마만인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시작과 끝까지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포행길 내내 얼굴에 가득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해서 절의 삼매에까지 들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몸 안의 나쁜 기운들이 모두 밖으로 빠져나간 것 같았습니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 이런 것이겠지요. 행복했습니다. 서로를 북돋우며 웃음을 나누며 도반들과 함께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승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 입은 도반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동네로 돌아와서도 화려한 도시와 사람들의 옷차림에 새삼 놀랐습니다. 묵언과 차수, 하심이란 절 안에서만 가능한 것일까요. 세상은 나에게 그와는 다른 것들을 요구했습니다. 절에서 닦은 마음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 또 다른 1080배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2시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길고 지리한 시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련회에서의 스님들의 가르침과 함께 하는 도반들이 있다는 것에 하루하루 정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악한 일 하지 않고 선한 일 많이 하며, 자기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세 살짜리도 알지만 여든 살 노인도 행하지 못하는 진리라던 스님의 말씀. 오늘도 새벽 세시면 법고를 치시며 중생을 구제하고자 성불에 힘쓰시는 스님들을 생각하며 내 자리에서 매진하고 정진해야겠습니다. 법고소리… 하늘은 비로 끊어지고 스님의 도 닦는 마음은 매섭게 북 위에서 부서집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하늘 하늘. 세상의 모든 축생이 내달리는 듯했고, 깊고 맑게 울리는 범종소리에는 비명 소리 가득한 아수라장 지옥이 고요해져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난 5일간 복종 속에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