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세기는 광기와 전쟁의 세기였다. 역사가들이 그렇게 정의했고, 많은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에 걸친 지구적 규모의 전쟁이 있었고, 그로 인해 수백만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2차 대전은 미국 중심의 체제를 구축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군사적 대립을 반세기 가깝게 지속시켜 왔다.
그렇다면, 21세기의 벽두에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 미국에 저항하는 이라크 무장세력의 행위에 대해서는 뭐라 말해야 하나. 잔혹과 처참? 최근 벌어진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와 이라크 무장세력의 미국인 참수 장면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이 두 장면으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잔혹과 처참의 시기가 되고 말았다. 이라크 전쟁은 부당성과 부도덕성의 상징으로 기록될 것이다. 9·11테러와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범죄 행위로 규정하고 규탄했다. “‘이라크의 자유,’ ‘충격과 공포’라는 작전, 민주화와 해방을 위해서 몇 백명이나 죽이는 전쟁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9·11과 같은 무차별테러는 중대한 범죄다. 동시에 무차별전쟁도 중대한 범죄다.”(토다 키요시, ‘환경학과 평화학’의 저자)
전쟁의 기원이 오래 된 만큼 평화의 구현을 위한 인류의 노력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은 그치지 않고 있으며, 언어적 수사에 의해 전쟁의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미국은 2001년 아프카니스탄 공습의 작전명을 ‘무한한 정의’ ‘영원한 자유’라고 붙였다) 그만큼 그 잔혹성은 더 가혹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평화를 위한 인류의 노력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평화에 대한 서구전통의 한계는 아닐까. 다시 평화를 따져보아야 한다. 레이몽 아롱은 평화를 “정치적 단위간의 대립적 폭력형태가 어느 정도 계속적으로 정치定置되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평화를 단지 전쟁에 반대되는 개념으로만 생각했다. 불교의 평화관은 내적인 평화에서 출발한다. “불교에서 평화는 ‘전쟁이 없는 외적인 평화’를 진정으로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내적인 평화’에서 출발하며, 따라서 탐욕과 분노로 표현되는 야심·이익·경쟁심·불안·공포 등과 같은 폭력을 낳는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평화의 개념을 더 넓혀놓았다.”(불교와 평화, 달라이라마 방한준비위원회 자료집, 8쪽)
불교도들의 첫째 덕목은 불살생이다. 불살생은 생명있는 모든 존재의 받듦이니, 불교의 세계에서는 전쟁이란 있을 수 없다. 《열반경》에서는 “모든 생명은 칼과 몽둥이를 두려워하며, 목숨에 애착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며 존재의 생명 유지를 본능으로 보았다. 《범망경》에서는 죽임을 금지함은 물론 나아가 생명의 살림을 보살의 마땅한 도리라고 설하고 있다. “만일 스스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거나 방편이나 찬탄으로 죽이거나, 그러한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주문으로 죽이는 것 등에 이르기까지 죽이는 원인과 죽이는 조건, 죽이는 방법 및 죽이는 행위 등을 통해서 내지는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을 일부러 죽여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보살은 마땅히 자비로운 마음과 효순하는 마음에 항상 머물러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을 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살생하는 자는 보살의 바라이죄이다.”
연기緣起의 관점에서도 전쟁은 비불교적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게 되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중아함경》) 연기론은 조화로운 관계의 가르침이다. 조화로움은 다름을 포용하는 데서 출발한다. 저것이 나의 존재 근거이며, 이것이 또한 저것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이다. 이것의 기쁨이 저것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를 헤아리는 자비심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전쟁은 존재의 근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가장 큰 무지와 무자비한 행위이며, 자비심은 평화의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불교의 평화관은 비폭력과 자비의 가르침에만 머물지 않았다. 전쟁의 중지를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노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샤카족과 꼴리아족의 물을 둘러싼 전쟁의 해결을 들 수 있다.
부처가 정각을 이룬 지 5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경악할 광경을 보고 말았다. 어머니의 종족인 꼴리아족과 아버지의 종족인 샤카족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의 불씨는 로히니강의 사용권에 관한 다툼이었다. 양측 모두 자신들은 로히니 강물을 사용하지 못하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며, 상대는 다른 강물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똑같이 주장했다. 농부들이 서로 헐뜯고 군인들이 종족의 명예를 지키고자 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을 때 부처님이 중재에 나섰다. 부처님은 무사들에게 물었다.
“싸움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무사들은 일순간 혼란스러워하며 대답하지 못한 채 무기를 내려놓았다. 부처님은 다시 물었다. “생명보다도 물이 소중합니까?” 무사들은 대답했다. “생명은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소중합니다.” 이에 부처님이 말씀했다. “그렇다면 물 때문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해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이밖에도 평화의 가르침은 거의 모든 경전에 나타나고 있는데, 《열반경》과 《법구경》, 《섭대승론》의 구절들이 많이 인용된다. “곧은 것을 남에게 양보하고 잘못을 이끌어 자기에게 향하게 하면 다툴 것이 없어진다.”(《열반경》) “이기면 원망을 낳고, 지면 열등감에 빠진다. 승부를 다투려는 마음만 버린다면 다툼이 없어지고 편안해질 것이다.”(《법구경》) “인내는 자타의 평화를 낳는다. 자신이 노여움의 과실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으면 자기를 평화롭게 함이요, 이미 분해하고 원망하지만 않는다면 남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니, 이는 바로 남을 평화롭게 함이다.”(《섭대승론》) “보살마하살은 온갖 중생에 대해 부모, 형제, 처자, 제 몸 같은 생각을 갖는다.”(《대반야경》)
인류는 평화의 방법을 익히 알고 있다. 욕망의 충족을 삶의 가치로 여기는 거꾸로 된 세계관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환경학과 평화학>의 저자인 토다 키요시의 제안을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혹과 처참함을 지우기 위한 노력의 단초로 삼으면 어떨까.
“인류의 평등, 민주주의, 비폭력(탈군사화, 탈원자력, 사형 폐지 등), 단순하고 윤택한 생활, 자연과의 공생을 기본으로, 끈질기게 서로 상의하면서 나간다면, 전망은 결코 어둡지 않다. ‘단순하고 윤택한’이라고 썼는데, <즐거운 불편>이라는 책도 시사하는 바, 허위의 풍요로움(낭비)을 버린다면, 그것은 가능하다.”<환경학과 평화학, 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