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연등을 만들며

다음 게시물
산설세설 - 성전 2004년 06월 268호
햇살이 눈부셔 눈을 감는다. 감아도 밀려드는 햇살에 행복해 하며 미소 짓는다. 오월은 그런 달이다. 눈을 감고 있으면 절로 행복해지는 계절이 오월이다. 산중에 사는 것이 투명한 행복으로 다가와 눈물짓게 하는 것도 오월이다. 오월은 햇살이 나비가 되고 꽃이 되어 가장 예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는 달이다.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낯익은 불자들과 함께 연등을 만든다. 손에 빨갛고 파란 물이 든다. 문득 봉숭아 물들이던 시절이 떠오른다. 봉숭아를 따다 백반과 함께 찧어서 손가락에 잔뜩 바르고 그것을 천으로 감싼 뒤 동동 동여매어 주던 누이의 모습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 내가 유난히 행복했던 것은 사소한 것을 맑고 고운 감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연등을 만들면서도 나는 행복을 예감한다. 세월이 흘러 내가 노스님이 되었을 때 나는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이 지금의 이 순간을 추억할 것이다. “그래, 내 젊은 시절에도 나는 이렇게 연등을 만들었지. 보살님들과 여럿이 모여서 연등을 만들 때면 이런저런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지. 우스갯소리도 곧잘 하면서 말이야. 웃다 보면 연잎을 가끔씩은 내 손등에 붙이는 실수를 저지르고는 했지” 하며 즐겁게 눈을 감고 지금의 이 시간을 떠올릴 것이다.
연등을 만들며 이것이 또 하나의 예쁜 추억을 빚는 일이이라는 사실을 나는 잊지 않는다. 가장 성스러운 이의 길을 밝히고 모습을 밝히고 가르침을 전하는 불빛은 내 기억의 길 또한 아름답게 비추어 줄 것이다. 그 불빛 안에서 내 언어와 행위는 한없이 순화될 것이다. 언어의 거침과 행위의 난폭함은 기억의 어둠에서 온다. 기억이 밝고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은 언어와 행위 또한 맑고 아름답다. 나는 사는 동안 내내 밝은 기억의 길을 걸어 아름다운 추억을 만나고 싶다.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행복한 말을 전하고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허리 굽혀 절하고만 싶다. 그러한 삶이라면 얼마나 행복한 삶이겠는가.
연등 부처님 시절에 선혜라는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부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부처님 오시는 길에 나가 삼단 같은 머리를 풀어 부처님 오시는 길에 깔고 부처님께 꽃 공양을 올린다. 진흙 속에 머리를 풀어 덮어 부처님을 건너게 하는 선혜를 보시고 부처님께서는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를 주신다.
가장 낮게 엎드린 자가 가장 빛나고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것을 우리는 부처님 전생 이야기 속에서 만날 수 있다. 가장 낮음으로 가장 높을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 삶의 진리인지도 모른다. 만약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싶으면 모든 사람의 발밑으로 가야만 한다. 선혜는 부처님의 발아래 자신의 머리를 두었다. 그런 그를 부처님은 온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물이 아래로 흐르듯 연등 부처님의 마음은 선혜를 향해 수기를 주신 것이다. 그 순간 머리를 풀어 진흙 위에 깐 선혜와 수기를 주신 부처님 모두 행복했을 것이다.
연등을 만들며 한 수행자와 부처님의 모습이 오월의 햇살보다도 아름답게 내려와 내 눈가에 머무는 것을 나는 보았다. 문득 그 모습을 잡고 나는 그들 사이에 서고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