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수행의 진일보를 위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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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2004년 05월 267호
어느 시인은 상실의 상처를 보듬으며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라고 노래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시인의 표현을 빌려 깨달음과 선을 절대적 가치로 삼는 한국불교에 대해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비판만한 불교사랑이 어디 있으랴.” 비판 행위를 불교보다 더 옹호하는 가르침이 또 있을까 할 정도로 불교는 비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조주 선사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는 물음에, 그렇다고 했다. 훗날 똑같은 질문을 하니, 이번에는 없다고 했다. 고정된 관념을 부숴버리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선어록은 부서진 허위의식과 관념의 기념비이다.
불교전문 계간지 <불교평론> 봄호(2004)는 특집으로 ‘깨달음과 수행에 관한 몇 가지 관점’이라는 제목 아래 네 편의 글을 싣고 있는데, 한국불교의 깨달음 지상주의와 선불교의 현실을 호되게 비판한다.
글쓴이들 모두 깨달음과 선불교에 대한 비판의 태도가 단호하다. 그리고 매우 강도 높다.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이다. 그만큼 깨달음과 선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척박하다는 감수성을 전하고 있다. 몇 구절을 읽어보자. “선이 최상승이면서도 어떻게 동시에 많은 사람을 가장 쉽게 열반이라는 목적으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아직까지 선불교 수행자들의 마음에는 교에 대해 선을 구별하고, 공안선에 대해 간화선을 구별하고, 간화선의 전통 중에서도 적통을 구별하려는 ‘분별심’만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안성두, ‘수행도의 다양성과 깨달음의 의미’)
그리하여 이제는 깨달음의 불교에서 ‘행복의 불교’로 나아가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자존심이나 고집, 허위의식보다는 솔직하고 양심적으로 깨달음과 수행의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내놓고 토론해보고, 또 깨달음과 수행의 문제에 대한 교리적 재점검의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는 것이 이 특집의 의도인 것 같다. 그래야 포교를 하든 수행을 하든 법륜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제언으로 읽힌다.
<불교평론>의 이번 특집에서는 깨달음과 수행이라는 불교의 ‘중심’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만큼 몇 가지 중요한 논쟁점을 제공하고 있다. 우선,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불교도들은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 목표라고 생각해왔고, 그 방법으로 선수행을 중심의 자리에 놓았다. 홍사성씨는 “한국불교가 수행의 목적을 잘못 정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고 해탈의 방법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아는 만큼 실천하는 것이 수행이다”고 말한다. 홍씨는 깨달음을 이렇게 정리한다.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진리와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지적 인식전환이라 할 수 있다.”
수행은 열반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삶 그 자체이다. 그러니까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그러했듯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깨달아진 진리가 요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인 줄 깨달았다면 나는 정말 부처로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화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화두 타파란 ‘그렇게 살고 있다’는 대답이어야 한다. 이것이 수행의 내용이어야 하는 것이다.”
김성철씨는 특집의 두 번째 글인 ‘선의 깨달음, 그 정체와 문제점’에서 “해체의 가르침이 가득 찬 선어록은 인도불교적 견지에서 볼 때 선에 대한 어록이 아니라, 해체의 지혜인 반야에 대한 어록”이며, “대승의 허구를 깨고 초기불전에 나타난 불교의 참뜻을 다시 살려낸 것이 바로 선인 것이다”라며 선이 지닌 의미를 복원하려고 한다.
김씨는 이어 선 곧 부처님의 마음 전체를 닮기 위한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추구하기 이전에 부처님이 출가하기 이전부터 지녔던 감성, 즉, 모든 생명체를 자신의 몸과 같이 대하는 자비심과 세속적인 쾌락을 싫어하는 염리심厭離心의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율律의 준수와 자자, 포살 의식은 이런 감성의 조련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다. 이런 감성 수행들이 선 수행을 뒷받침할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성택씨의 글 ‘깨달음의 불교에서 행복의 불교로’는 “한국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의 종지로 삼고 있는 선불교가 붓다의 깨달음을 전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최상승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님은 이미 많은 지식인 불자들에게 상식이 된 지 오래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는 곧바로 깨달음의 유용성을 정면으로 제기한다. “현대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환경을 염두에 둔다면, 수행의 목적을 깨달음에 두고 있는 전통은 이제 폐기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불교의 정신이 시간과 공간의 변화라는 역사 속에서 항상 새롭게 구현되었듯이 새로운 종교환경에 대응하는 불교의 모습이 요청된다는 것인데, 현실의 불교는 깨달음 지상주의에 갇혀 있다고 진단한다. 현대사회는 전문화와 그에 따른 삶의 분절화, 다원화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교단 내부적으로는 교육받은 재가자의 증가와 이에 따른 불교의 보다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모색하고 있다. 선불교가 한 시기의 역사적 산물이었듯 “최종적 깨달음만을 목표로 한 출가중심의 불교는 현대사회에 더 이상 유용성이 없다고 본다”는 것이 글쓴이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나와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보살사상의 재해석을 제안한다. “중생구제의 서원으로 ‘깨달음을 미룬다’라는 보살사상은 그 출발의 종교적 동기가 출가중심 불교의 깨달음 지상주의의 극복에 있었다고 본다.”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욕망의 감소를 통해 행복지수를 높여가는 것이 바로 불교적 행복 추구 방법이다.”
안성두씨는 ‘수행도의 다양성과 깨달음의 일미一味’를 통해 현재의 수행론과 간화선 중심주의의 문제점을, 다른 수행체계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선의 교조화, 경험의 직접성(不立文字)에 대한 과도한 강조에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선의 위치를 재확인하고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수행 방법의 다양성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일 모든 사람에게 맞는, 모든 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만능의 치료약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극히 비역사적일 뿐 아니라 교리적으로도 극히 위험한 것이 될 것이다”고 안타까워하며 《해심밀경》에서의 ‘일미一味’를 주목한다.
“최상승의 방식으로 획일화된 ‘일미’의 수행법보다는 다양한 수행도를 통해 궁극적인 ‘일미’에 대해 깨닫는다는 《해심밀경》의 설명이 오늘날의 상황에서 보다 적시적適時的인 것은 아닐까?”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특히 한국 선은 세계불교와 정신사에서 독특한 위치에 놓여 있다. 한국불교와 선에 대한 기대에 답하기 위한 ‘진일보’의 시기이다. 새로움은 언제나 산고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