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되려 했던 나의 출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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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성수/황대선원 조실
2004년 05월 267호
〈초심初心〉을 하루 만에 다 배우고 외우자, 〈발심發心〉을 내놓은 우리 스님에게 붙들려 나머지 〈자경문自警文〉까지를 사흘 만에 다 배우고 외워바쳤더니, 스님은 더 나아가 49일 만에 《초발심자경문》을 십만 독讀을 할 것을 명했다.
숙겁의 인연이었으리라. 세 글자만 배우고 떠나리라던 결심은 이미 사라지고, 나는 스님의 명을 받들었으니 말이다. 첫날부터 신명을 내어 큰소리로 읽으니 스님께서 ‘절이 시끄러워서 안 된다. 속으로 외워라’ 하셨다. 그런데 속으로 외우니 더 잘 외워졌다.
일념으로 49일 만에 책 세 권을 십만 독 해서 외워바치니, 스님께서 무엇을 감지하셨는지 ‘너는 부처와 인연이 있다. 그러니 나와 함께 부처님 앞에 가서 백일 동안 절하자’ 하시는 게 아닌가. 그리 말씀하시곤 속복을 입은 채인 나를 위해 암자를 내놓고 정선 갈래사 적멸보궁으로 함께 갔다. 그곳에 가서 스님과 함께 부처님께 백일 동안 절하고 나서 해제를 했는데, 스님께서 다시 그 너머 원효 대사가 머물렀던 토굴터로 데리고 가더니 양기가 자글자글 서린 토굴 앞에서 말씀했다.
“네가 여기서 10년 살면 원을 이룰 것이다.”
그곳에서 그렇게 혼자 풀만 먹고 기도를 드리며 보낸 세월이 삼년쯤 되었을 때일 것이다. 약초를 캐러 올라왔던 동네 사람이, ‘해방이 되었는데, 왜 여기서 고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토굴을 내려와 수소문 끝에 우리스님이 있는 내원사엘 찾아갔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이 ‘니, 잘 왔다. 내가 이곳 주지하려고 하니 네가 좀 거들어라’ 하셨다. 거기다 대고 내가 냅다 소리질렀다.
“스님, 골치 아픈 절 주지 그만하시고 스님 자신의 주지 좀 하시오.”
당시 남방 제일 선원으로 일컬었던 내원사 주지로 있던 나의 스님은 나의 그 말에 아무 말도 안하고 있더니, 삼일 만에 입을 열어 다른 말은 안하고 해인사 총림으로 가서 공부하라고 했다. 여전히 속인인 채로 있는 내게 당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한 벌 입혀주고 가사 장삼과 걸망, 그리고 여비를 주었다.
해방 후 총림을 만들어 전국의 중들을 가르쳤던 해인사엔 효봉 스님이 방장으로 계셨고, 부조실에 인곡 스님, 도감에 구산 스님, 도총섭에 청담 스님이 자리를 맡아 있었다. 해인사엘 찾아가 하룻밤을 자고 나자 지객 스님이 도감인 구산 스님에게 나를 데리고 갔다. 구산 스님이 나를 보자 공양주를 하라고 해서 내가 감히 그랬다.
“나는 그런 것 할 줄 모릅니다.”
“배워서 해라.”
“저는 도를 배우러 왔지 밥하는 것 배우러 오지 않았소.”
사흘을 달래며 종아리를 치기도 하고 달래도 내가 말을 듣지 않자 청담 스님에게로 넘겼다. ‘중물 잘 들여라’ 하며, 또 청담 스님이 사흘을 달래도 밥을 짓지 않으니, 부조실인 인곡 스님에게로 넘겨졌다. 그러나 내 황소 고집을 인곡 스님인들 꺾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마지막에 방장인 효봉 스님에게로 인계되고 말았다. 잡혀가 꿇어 앉으니 효봉 스님께서 그러셨다.
“네, 이 놈. 하심하기 위해서 하심 좀 해라.”
그리 방장스님이 명령하면 꼼짝없이 공양주를 해야 할텐데도 기고만장해서 고집을 꺾지 못하고 나는 그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려들 듯 그랬다.
“조실 큰스님께서 저 위에 상심을 가지고 이 밑에 하심을 하라고 해야지, 상심이 뭔 줄 모르는 놈에게 하심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
49일간 《초발심자경문》을 십만 독을 해서 사는 틀이 온전히 잡히면서 눈동자도 움직거리지 않을 만큼 집중되는 경험을 했고, 또 그 뒤 삼년을 풀만 먹으며 공부를 하고 나온 당시의 나는 아마도 아무 것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으리라. 서너 시간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있던 효봉스님께서 나에게 말을 놓지 않고 물었다. 스님의 나이 예순넷, 내 나이 스물셋이었다.
“수좌는 여기까지 왜 왔소?”
“도를 배우러 왔습니다.”
“도를 아요?”
내가 또 달려들 듯 그랬다.
“도를 알면 저희 집에 있지 여기까지 왜 왔겠습니까?”
효봉 스님이 나의 당돌한 말에 구애치 않고 말씀했다.
“도道는 칠일 안에 해결지어야지 칠일 만에도 해결하지 못하면 칠십년을 해도 안 되네. 그러니 칠일 안에 도를 해결하지 못하면 조실 주장자에 맞아 죽어도 실언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스님께서 초안을 잡아준 서약서에 지장을 찍고, 행자인 처지에 조실 시자 대우를 받으며 선방 좌복에 앉기에 이르렀다. 칠일 만에 해결하지 못하면 맞아 죽기로 서약서까지 썼으니 얼마나 몸도 마음도 바빴겠는가. 사흘 동안 밥도 물도 먹지 않고 좌복에 앉아 악을 쓰며 얼굴이 벌개가지고 있으니, 입승이었던 서옹 스님이 밥을 가져와 입에 넣었으나 말을 듣지 않자 죽비로 엉덩이를 쉰 대를 때렸다. 그래도 먹지 않으니 지대방으로 끌어내 이불을 덮어 씌우고 네 귀퉁이마다 사람을 놓아 감시하게 했다. 그들이 조는 틈을 타서 살짝 일어나 선방에 들어서니, ‘저, 수좌. 쉬라고 했는데 왜 들어왔어?’ 하는 입승 스님의 소리에 ‘이 자식아 네 걱정이나 해라’ 해버렸다. 입만 벌리고 어이없어 가만 있었던 그 당시의 서옹 스님이 떠올라 미안한 마음에 지난 번 스님 입적 때 백양사엘 세 번 다녀왔다.
나의 기고만장함은 이에 그치지 않았으니, 그 후론 고함을 지르며 ‘이 놈의 새끼 도道야 날 죽일래, 살릴래. 빨리 나와라’ 했으니 그리 고함을 질러도 열 명이 넘는 수좌들이 입도 손도 대지 못했다. 그렇게 엿새 만에 펄펄 끓던 열이 쑤욱 내려가고 생각이 척- 나자 효봉 스님께 갔다.
“도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건 아닐세.”
“성수 내 것은 아닌 것이 도이거니와 효봉 네 것 내놓으시오.”
“그러면 못쓰네.”
“여기 쓰고 못쓰고 자시고 할 것이 어디 있소?”
그러면서 내가 쏟아놓은 게송은 이랬다.
“천하의 만물은 무비선無非禪이요(선 아님이 없으며), 세상만사는 무비도無非道라(도 아닌 것이 없다).”
그래놓고는 하루에 열 번씩 들락거리며 스님의 멱살을 잡고 ‘당신 것 내놓으라’며 호기를 부렸으니, 내 젊은 날의 그 시절은 죽기로 작정했으니 안하무인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리 덤비고 설치고 부시대며 가만 있지 못하고 안하무인에 호기를 맘껏 부렸던 내가, 나름대로 눈이 쑥- 내려가서 체계가 서고 눈이 똑 떨어진 것은 봉암사 결사에 잠시 참여했다가 해인사로 다시 돌아와 효봉 스님을 뵙고 난 후였다. 중 가운데 제일 점잖은 효봉 스님에게 욕을 하고 항의하다가 그리 두 번째 다시 만나면서 철이 들었고 그뒤 입을 다물고 살았다. 스님의 방문 앞을 지날 때면 ‘고맙습니다’ 하고 절을 하면서 지나갔는데, 그때 공손히 하던 절이 몸에 배서 언젠가 내가 절을 하는 것을 보고 신도 한 사람이 특이하다고 했다. 절이란 한 자리를 해도 천 자리, 만 자리 하는 것보다 낫게, 부처와 뜻이 척- 통하고 부처를 그대로 활불로 보고 성의와 정성이 든 절을 해야 제대로 하는 것이다.
공부하는 수좌는 서른 전에 공부 되게 해가면서 그리 까불어야지, 나이 들면 그리도 못한다. 강원엔 문턱에도 안 가고 그리 부시대고 설쳐대다가 삼 년 뒤 해인사에서 계를 받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행자시절을 마감했다. 스승을 잡아먹겠다는 용기로 팽배했던 추억 많은 시절이었다.
불교는 생사자재법이요, 불살생법不殺生法이다. 불살생법은 무엇인가. 영생불멸한다는 뜻이다. 절은 그 늙어죽지 않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이요, 참선은 영생불멸하는 진리를 참구하는 것이다. 학문은 익혀야 되고 기술은 연습하는 것이로되, 진리는 연습하고 익혀서 되는 게 아니다. 업이 녹아야 사람이 되고 부처가 되는 것이다. 눈을 뜨고 열심히 정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