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의 가뭄 끝에 촉촉이 봄비가 내린다. 봄비에 촉촉이 젖은 파란 풀밭을 맨발로 자근자근 밟아보고 싶다. 꼭 필요할 때 내리는 비는 생명수며 감로수다. 목마른 대지가 원할 때 내리는 감로수처럼, 홍역을 치르며 끝낸 지난 총선을 지켜보며 올바른 정치 문화에 목마른 국민들 앞에 17대 국회가 감로수가 되고 국민의 생존을 위해서 성실하게 일하는 생명수 같은 존재가 되길 기대해본다.
스님들이 가까운 도반들끼리 주고받는 말 중에 ‘수도승’이라는 표현이 있다. 수도승이라는 표현을 쓰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 살아서 ‘수도승’이라 하고 둘째는 무엇보다 본분사인 도를 닦는 스님이라고 해서 ‘수도승’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서울 수도에 사는 수도승으로서는 적잖은 고단함을 감수해야 살 수 있다. 가끔은 잿빛 옷을 입은 스님들을 향한 거침없는 폭언과 거친 행동으로 시비를 걸어와도 재치 있게 받아 넘길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영락없는 이방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일이다.
몇 주 전에 전철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분당을 가기 위해서 출발지에서 7호선 전철에 몸을 실었다. 7호선은 도봉산 근처 장암역에서 영등포를 지나 온수까지 정거장 수가 마흔둘이나 되는 꽤 긴 노선이다. 장암 쪽에서 출발하는 전철을 타면 도봉산 산행을 마치고 산 아래 내려와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신 승객들이 많이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길게 앉은 승객이며, 코고는 소리가 전철 경적소리가 무색할 정도인 승객이며, 술을 이기지 못해 끝내 상대편에 앉아 있는 사람 앞에 속절없이 다 쏟아 놓는 승객이며,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고성으로 친구에게 시비를 거는 승객이며 참 다양한 사람의 군상을 보는 날이었다. 삶이 고달픈 사람들의 몸부림이겠거니 하며 이해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결국 전철 칸을 옮겨서 고속터미널 까지 가야만 했다.
약속시간 관계상 고속터미널에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3호선을 갈아 탔다. 공휴일이었던 탓에 구파발 쪽에서 오는 3호선 역시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참을 만했다. 수서역에서 분당행을 갈아타고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거의 파김치가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까? 전철역까지 마중을 나왔던 천주교 자매님과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수녀님은 편치 않은 내 얼굴을 보고 어디가 아프냐고 한 걱정을 했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사람 냄새 못 맡기로 유명한 내가 민감한 코를 탓하며 뭇 사람들의 냄새를 감당하며 목적지까지 가야만 했던 봄나들이는 지금도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그 뿐이겠는가. 우리 젊은이들이 언제부터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과감한 애정표현이 있었던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이제 고전이 되어가고 있다. 좁은 전철 안에서 고개를 들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보이는 시선 안에 있는 그런 풍경을 어른들은 남의 자식이라 뭐라고 한 마디 하지도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앉아서 봐야 하고, 바라보는 사람이 무색하면 얼굴을 돌리든지 눈을 아예 아래로 뜰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또 휴대하기 간단한 MP3 때문인지 옆에 앉은 사람 귀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음 같은 음악이 열려 있는 귀로 그냥 흘러 들어온다. 전철을 주로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아는 불자가 일을 마치고 피곤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와 같은 상황이 있었단다. 듣다 못한 그 불자는 정중하게 그 학생에게 소리 좀 줄여 달라고 요청을 했더니 너무 음악 소리가 커서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학생은 “네? 음악 듣고 싶다구요? 그러면 같이 들으세요…” 하면서 이어폰 하나를 빼 주더란다. 그래도 그 학생은 그렇게 무례하지 않고 양호한 셈이다.
전철을 타면 또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2호선을 타고 다시 3호선을 갈아타야 충무로역에 내려 학교에 갈 수 있었다. 정말이지 전철을 타고 순례 아닌 순례를 해야 하는 것이 조금 변두리에 사는 도시인의 비애이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사범대학 강의실에서 있는 강의를 듣기 위해서 직장인들 출근 시간이 끝나갈 무렵 전철을 탔다. 한바탕 출근길 인파가 지난 시간이라 조금은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시험을 치를 선지식인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저쪽 칸에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전도해야 할 표적을 발견했던지 점점 다가올수록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높아지는 것이다. 급기야 내 앞에 와서는 발걸음을 옮길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 칸에 몸을 실은 승객들이 무슨 죄가 있으랴. 그래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사람이 지나온 칸으로 옮겼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나를 예수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참 가관이었다. 세 칸을 그렇게 옮겨가다가 나도 만만치 않게 기운이 솟았다. 전철이 달리는 속도와 굽어지는 길 형편에 따라 흔들리며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비호같이 홱 돌아보니 그 사람도 당황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미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시비를 할 수 없어서 전철이 출발하기 직전에 그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고 말았다.
나뿐만이 아니다. 정릉 쪽에 사는 스님이 시내 출타를 나갔다가 들어가는 길에 4호선을 탔다고 했다. 그 스님은 내가 봐도 연세에 비해 모습이 고우셨다. 그런데 그 스님은 나보다 더 황당한 일을 겪으셨단다. 내 앞에 서서 오직 이단을 예수님 품안으로 전도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목소리 높이던 그 사람처럼 그 스님 앞에서 침을 튀기며 소리를 높여서 내려야 할 정거장은 아니지만 그냥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지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에 섰단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이 스님을 쫓아와 뒤에서 끌어안았던 것이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인가. 전철 안에서 바라보던 사람들도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하며 바라보고 있었고, 그 스님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순간 당황했지만 반사적으로 밑으로 빠져나와 홱 돌아서서 양쪽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고 했다. 순간 전철 안에 있던 사람들이 종교를 떠나서 한결같이 박수를 치면서 “스님 잘하셨어요. 맞아도 싸지… 쯔쯔쯧…” 하면서 혀를 차는 사람도 있더라고 했다. 성희롱으로 가만히 안 두겠다고 작정하고 멱살을 끌고 경찰서로 가자고 내리라고 호통을 쳤더니 꽁지 빠지게 도망을 가더라고 했다.
또 좀 체격이 있는 어떤 스님은 선객인 도반스님하고 전철을 타고 가다가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도반스님이 곁에 있으니 믿는 마음에서 더 용기가 나더란다. 그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 도리를 알면 교회를 따라 가겠다…”고 하면서 정강이를 사정없이 두 번 걷어찼다고 했다. 혼자라면 시비가 귀찮아 그럴 생각을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여러 번 그런 일을 당하기만 했는데 그날은 속이 다 후련하더라고 후일담으로 웃으며 말했지만 당하는 순간에는 견디기 쉬운 일만은 아니다. 우리와 같은 유사한 일을 수녀님들도 많이 겪는다고 했다. 수녀님들은 뒤에서 베일을 잡아 당겨서 못 살게 구는 모양이었다.
자연과 인간이 더불어 사는 일보다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 사는 일이 더 많은 인내와 용기를 요구한다. 예전에는 자신이 아무리 표현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이 있을지라도 주변 사람을 한 번쯤 생각하고 행동했다. 어른 앞에서 어려움도 알았고 자기 부끄러움과 남부끄러움도 알았다. 위아래 남녀노소 양보할 줄 아는 미덕과 남의 자식 내 자식 가리지 않고 젊은이가 언행이 바르지 못하면 바르게 지적하고 견책할 줄 아는 어른도 있었다. 세상 변화에 따라 우리 승가도 예외는 아니다.
도심에 사는 스님들이 겪어야 하는 비애라고 해야 할까, 수도승의 수도를 돕는 선지식들이라고 해야 할까. 고단한 일들을 겪다 보면 도심도 단단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전철 안에서나 길거리 곳곳에서 만나는 고단한 사람들의 삶의 표현은 음으로 양으로 스님들의 도업을 돕는 선지식들이 되는 셈이다.
꿈보다 해몽을 잘 하며 긍정적인 사고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