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 물이 가장 많이 오른다는 곡우穀雨, 고불총림 백양사에서는 매년 이날에 문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례제를 올린다. 그런데 올해는 특별한 의미가 더해졌다. 지난해 말 입적하신 서옹 스님의 뒤를 이어 고불총림 방장이 된 지종 스님의 추대식이 거행된 것이다.“불고명이명자양不沽名而名自揚
이름을 내지 않고 감추려 해도 자연 그 빛은 발하게 되는 것이요
불소중이중자지不召衆而衆自至
여러 사람을 부르지 않아도 실력이 쌓이면 자연 따라오기 마련이라”
백양사가 공식 총림이 된 것은 서옹 스님에 이르러서지만, 애초 총림을 만든 이는 만암 스님이었다. 해방후 식민지 불교를 청산하고 청정한 수행가풍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1947년에 총림을 설치하였다. 그러니 지종 스님은 고불총림의 3대 방장인 셈이다.
스님은 내가 무슨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나이까지 허송세월 하다 어쩔 수 없이 백양사 문도들이 제일 어른이라 추대하니 대답을 하긴 했지만, 큰 어른들께 누가 될까 걱정을 앞세우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총림에 비해 규모가 작고 빈약하니 강원을 더욱 활성화시키고 율원도 복원하고 싶다는 바램을 피력한다.
“백양사는 산이 강하고 물이 약해. 부자가 되려면 개울에 물이 풍부해야 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백양사 재정은 안 좋아. 그러나 산의 정기로 선지식들이 많이 배출됐지. 종정을 많이 배출해 ‘종정 모자리’라고 할 정도로.”
그러고 보니 만암 스님이 종정을 세 번하셨고 서옹 스님도 5대 종정을 역임하셨다. 조계종은 아니지만 태고종 종정을 지낸 묵담 스님도 백양사 출신이다.
스님은 백양사가 지금도 재정은 풍부하지 않지만, 인걸이 떨어지지 않는 도량임을 자랑스레 말한다.
지종 스님은 누구보다 만암, 서옹 스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충실하게 받들며 한평생을 살아온 분으로, 전 방장 서옹 스님과는 불과 열 살 차이가 날 뿐이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뜻을 거스른 적이 없다고 하니 흔치않은 믿음과 무던함을 짐작케 한다. 특히 스님에게 있어 만암 스님은 절대적이었다. 지금도 스님은 누구를 만나나 만암 스님 이야기를 많이 한다. 만암 스님의 어떤 점이 가장 존경스럽더냐고 하자 서슴없이‘일체가 다’란다.
지종 스님이 본 만암 스님은 강직하고 천성이 곧고 일거수일투족이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언행이 일치한 분이셨기에 치문의 가르침대로 오라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자연 따르는 그런 분이었다. 언행일치를 강조하셨던 만암 스님은 본인 스스로도 그렇게 살아오신 분이었단다. 지종 스님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언행일치를 제일로 삼는다.
“언행이 일치하지 않으면 공덕이 없어. 사기꾼이지. 물을 어끄르면 주워담을 수 없듯이 말도 한번 뱉으면 그만이지, 그러니 실천할 수 있는 말을 해야지. 누구든 말은 할 수 있지만 실천에 옮기는 것은 힘이 들거든.”
만암 스님의 언행일치는 서옹 스님에 와서 참사람으로 이어졌다. 바로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 무위진인, 참사람의 근간이라는 말이다.
“중 승僧자는 사람 인人변에 일찍 증曾자거든, 무리 중衆자와 달라. 승자가 격이 높아. 왜 그러냐면 사람이 된 연후에 스님이 돼야 값어치있는 선지식도 되는 것이지, 사람도 못 된 것이 중이 되면 학문만 높아가지고 사부량거리기는 잘해도 실속이 없어. 마음이 첫째 유식해야 하고 그런 연후에 문자가 유식해야 금상첨화지, 마음은 무식한 놈이 문자만 유식하면 사기꾼에 불과하지. 그러니 사람 먼저 되기 위해 배우는 것이지.”
지종 스님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점은 언행이 일치하는 것이요, 그리고 나부터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종단 발전의 해법은 스님들이 삼독심을 버리고 첫째가 공심이요, 둘째가 화합, 셋째가 도제 양성하면 더 이상이 뭐 필요하냐고 덧붙인다.
올해로 세수 여든셋. 열아홉에 백양사로 출가하여 64년간 절집에 살면서 스님 스스로가 철저히 공심公心으로 살아왔다. 어른들을 존중하며 그 뜻을 받들어 산다는 것은 사심이 개입되면 가능하지 않다. 덕분에 어른 스님들에 가려 그동안 그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사실 스님은 선방에서 수행을 원했다. 선원에서 정진 중이던 스님은 어른의 부르심을 받고 내려와야 했다. 정화라는 이름하에 지난한 비구대처분쟁이 시작됐고 비구들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자, 정화의 선봉에 섰던 만암 스님은 선방에서 수행 중이던 지종 스님에게 절살림의 임무를 맡겼다. 이때부터 엇나가기 시작했다고 스님은 말한다. 이후 완도 신흥사, 부산 개암사, 백양사 주지 등을 지냈고, 75년 불갑사에 주지로 온 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스님은 수행에 전념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살림 사느라 다닌 것이 늘 안타깝다. 허송세월 보냈다 함은 나이 든 스님들이 흔히 하는 얘기지만 행로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다.
환경 탓만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약을 끼고 살 정도로 허약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뱃속에 회가 있으면 그렇다 하여 회 떨어뜨린다고 휘발유 두 홉을 마신 적도 있다. 그래도 안 떨어져 석유를 맥주병으로 먹으면 빠진다 하여 그리했다 몸만 더 망가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중에 병원에서 사진을 찍어보니 담석이라, 쓸개에 돌이 있어 자꾸 찌르는데 그 고통을 말할 수가 없었다.
수술하면 된다 하나 당시만 해도 돈이 없어 수술을 못하고 염불이나 하다 죽자 하고 천수주력을 했다. 그런데 스무하루째 되는 날 주력을 하다 꿈인지 생시인지 입속에 손을 집어넣어 끈적끈적하고 검은 무언가를 마구마구 빼냈는데, 다 빼내지를 못하고 끝이 잘려버린 상태에서 아쉬움에 눈을 떴는데, 실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병은 다 업이라, 업을 다 파내야 했는데, 수양이 적어서 끊어져버렸지.” 그리고는 10년간 괜찮았는데, 다시 도져 30년 전 수술해서 떼어내버렸다. 그래서 스님은 자신이 쓸개가 없다며 웃는다.
6년 전에는 불갑사에 평소 원이었던 선원을 개원해 수좌들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스님 표현에 따르면 서산낙일西山落日이라나. 수행도 젊어서 힘이 있을 때 하는 것이지, 늙어서 정신차려 공부하려 하면 몸뚱이가 말을 안 듣는단다. 그러니 젊었을 때 정신 바짝 차려 수행해야 한단다.
나이가 들면 육신이 내 마음대로 안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굼뜨고 게을러지기 마련인데 몸뚱이 육신 덩어리에 너무 끄달리면 자기 정신도 흐려져 육신에 끙끙대선 안 된다는 것이 스님의 소신이다. 그렇다고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관리가 철저하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방에 모셔놓은 원불에 예불하고 앉아서 참선을 하고 나름대로 터득한 체조를 잊지 않는다.
낮에는 경내를 돌며 산책을 즐긴다. 그러면서 사중 일을 하나하나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불갑사 주지 만당 스님은 아직도 사중 일을 하나하나 지시를 받을 정도로 꼼꼼하고 정신이 좋으시다고 한다.
그렇게 허약체질이었음에도 스님은 여든셋이라는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아직 정정해보인다. 스님 방에 11년 전 원로의원 스님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어 살펴보니 대부분 입적하셨고 지종 스님을 포함하여 세 분만이 살아 있다. 스님은 새삼 세월이 빠르다며 허허 웃는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허약함을 보완하기 위한 관리가 결국은 장수로 연결된 모양이다.
봄에는 신도들과 나물을 캐러가기도 하는데, 올해는 쉬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절 주위에 차밭이 조금 있는데, 차를 따다 직접 만들어 드셨다. 스님이 만든 차맛은 특별하다고 입을 모은다.
스님의 차 만드는 방법은 다른이들과 다르다.
다른이는 따서 가마솥에 찌지만, 가마솥에 물을 뿌려 뒤집고 비비기를 다섯 차례 정도 한 후에 풀어서 아홉 번을 덖는다. 그 일을 밤새 하는데 잘못하면 타버리고 덜 마르고 열 맞추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스님의 차를 보통 선차禪茶라고 부르는 데는 그 방법에 있는 것만이 아님은 분명하다.
“다선일여라 차와 선이 둘이 아니라. 차하는 정신과 참선하는 정신이 하나가 돼야 해. 그러면 다선일여지. 차도 선에서 나오고, 차 마심도 선에서 나오고 그 속에서 사니 둘이 아니라.”
내년에는 백양사에서 스님이 만든 선차 마시며 법문 듣는 영광을 누렸으면 하는 욕심을 부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