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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편하게 하다(安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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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이야기 그림 이야기 - 김현정 2004년 05월 267호
뭇 생명이 이 세상에 오고자 하는 그 마음과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다른 것이 있을까?
스승께서 이르셨다.
‘사람은 이 산하대지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지라 그 살아가는 방편을 짓는 것에 수천 갈래로 머리를 써버리고 도심道心은 쉽사리 잊고 살아가니 사람의 머리를 두고 조두鳥頭라 하느니라. 또, 귀신들은 사람의 마음을 타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호시탐탐 세상에 던져 놓은 낚시와 그물이 몇 만 코인지를 알 수 없어 이를 어목魚目이라고 하는 것이다. 새들은 허공을 날아올라 높이 날면 구천九天에 닿는 것이요, 내려와 이 세상 구석구석에 이를 수 있어 구천九泉이라 하는데, 천상과 지상의 소식을 다 알고 있으니 이를 조식調息이라 하는 것이다.
난鸞새나 봉황이 천상에 오를 적에는 반드시 날개 깃털의 힘을 빌린다 했거늘. 아, 애석하구나 가히 사람으로서 태어나 그 살림살이가 이 새만도 못하단 말인가.’
이렇게 탄식하시며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 글을 전해주셨다.
내가 태어날 때 먹었던 초심初心을 잃고 진리는 오고 간 바를 모르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새들이 새 대가리라 비웃더라도 일언에 반구도 대꾸할 수 있는 바가 못 되었다.

혜가慧可 조사가 초조初祖 달마達磨 문하에 있을 때 일이다.
혜가 조사가 스승을 섬기기를 밤낮으로 지극하였으나, 아무런 가르침도 듣지 못하였다.
눈 오는 어느 날 밤, 혜가가 달마의 거처 앞에서 꼼짝 않고 서 있으니 새벽녘에는 그 눈이 무릎까지 쌓였다.
달마께서 물으시길,
“그대는 나에게서 무엇을 구하는가?”
혜가가 답하였다. “가르침을 베푸시어 중생들을 제도하여주십시오.”
“법法을 구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하니, 이에 혜가는 칼을 뽑아 왼쪽 팔을 잘라 대사 앞에 놓았다.
혜가가 말했다.
“제 마음이 편치 못하오니 대사께서 편하게 해주십시오.”
“그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편하게 해주리라.”
혜가는 곧, “마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자,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고 하였다.

훗날 진리가 말로 표현되는 경지가 아님을 밝히고 달마로부터 그 골수를 얻어 그 뒤를 이어 이조二祖가 된 혜가慧可 스님이다. 혜가는 자신의 팔을 잘라 보임으로 진리를 구하는 마음가짐을 증명하였고, 자신의 의지를 찾아 깨달음으로써 곧 스스로 마음의 편안함을 얻었다. 그 의지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것이니, 자신의 의지를 되찾은 즉시 마음을 편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석각石恪의 <이조조심도二祖調心圖>에는 한없이 편안한 혜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림 속 이조二祖대사의 몸가짐과 상호에는 한 점의 의심도 찾아볼 수 없다. 어깨에서 한껏 힘을 빼고 있는 그는 고개를 숙여 남은 오른팔에 편히 기대고 그 몸은 졸고 있는 호랑이에 온 몸을 기대어 함께 졸고 있는 모습이다. 비록 가사袈裟로 가려져 있으나 왼쪽 축 늘어진 소매품으로 그의 왼팔이 번민과 함께 잘려나간 것을 알 수 있다. 가히 산군山君이라 일컫는 호랑이의 용맹도, 죽기를 각오한 조사祖師의 각오도 이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조식調息하고, 조심調心하는 모습만 있을 뿐이다.

석각石恪은 중국 오대五代에 활동했던 화가로 북송北宋 때의 기록에는 그가 촉蜀나라 사람으로 성격이 활달하고 그림에 규범이 없고, 붓질에는 일격逸格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불교인물화에 능했던 그가 화원畵員으로서 상국사相國寺 벽화를 그리라는 명을 받았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하니 이를 허락하였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화원畵員이 되어 국가적 불사에 동원되는 것이 참으로 명예로운 일이었겠으나, 이미 이조조심二祖調心과 같은 경지를 알고 있던 그가 선택한 것은 안심安心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조조심도에서 석각石恪의 필법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으나, 단 한 순간의 의심도 보이지 않는 활달한 일격逸格이 있다. 그림 속 혜가 스님의 편한 모습은 이전에 팔을 잘라 보이던 결연함을 뛰어넘어 얻어진 바일 것이다. 그 의지를 지속하고자 어찌 계속 팔을 자를 수 있을 것이며, 그 목숨을 내어 놓기를 여러 번일 수가 있을까. 도道에 임해서는 천지天地와 더불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상책上策 중에 상책이다. 잔뜩 힘이 들어간 목과 뻣뻣한 어깨짓만으로는 그 의지와 실천이 오래 가지 못한다. 우리의 생활에서 얻어진 마음의 큰 병들이 큰 욕심을 이루고자 지금 내 어깨에 들어간 너무나 많은 공력과 힘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큰 병에는 약을 쓸 수 없지만, 혹 약이 있다면 다만 안심安心, 안심安心뿐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