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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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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2004년 04월 266호
지난해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작은 책 한 권. 상당히 도전적인 질문을 던져놓고는, 부정태의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는 책,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는 우리의 삶의 형태를 뜯어보게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세 가지 중독 - 소비주의, TV, 광고 - 의 거친 공세에 자유롭지 못한 현대도시인들의 삶이 비상식의 토대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과 같은 것임을 발견하게 해준다.
저자는 일본 쓰다대학(津田塾) 정치학교수인 미국인 더글러스 러미스인데, 먼저 ‘발전’이라는 말이 곧 착취이며 폭력적인 변화를 강제하는 것이라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내포한 개념임을 드러낸다.
“발전이라고 하면 그것은 흡사 각 문화나 문명, 사회 속에 있는 가능성이 해방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꽃이 피는 듯한, 씨앗에서 나무가 자라는 듯한 어투입니다. 아이가 성장하는 듯한 어투입니다. ‘착취’라는 말과 상당히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 내정간섭이 아니라 발전, 착취가 아니라 발전, 폭력적인 변화가 아니라 발전이 됩니다. 어떤 문화, 어떤 사람들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능력을 해방하는 것과 같은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경제발전으로 빈곤은 해소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앞서 제국주의적 발전이란 말의 허구성을 밝혀냈듯, 경제학에서는 정의正義의 가치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빈부의 차이란 경제발전에 따라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는 정의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빈부의 차이가 나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경제학 용어가 아닙니다. 경제학 공부에서는 정의라는 말을 배우지 않습니다. 빈부의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커녕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정의’란 정치용어입니다. 빈부의 차이는 경제활동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의논하고 정책을 결정하여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대항발전’이 인류가 추구해야 할 발전이라고 제시한다.
“대항발전에서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까지의 발전의 의미, 곧 경제성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은 경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거꾸로 인간사회 속에서 경제라는 요소를 조금씩 줄여가는 과정입니다. 대항발전의 첫 번째 목표는 ‘줄이는 발전’입니다. 소비를 줄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목표는 경제 이외의 것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문화 그런 것을 발전시킨다는 뜻입니다. ”
그런데, 소비를 줄이는 것이 가능할까? 이런 의문에 곧 부딪히고 만다. 물질적 욕망의 충족이 행복이라고, 어느덧 소비주의에 깊이 중독된 우리에게 소비를 줄이라는 말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쇼핑을 취미와 여가생활로 여기고 있을 정도로 소비주의에 푹 빠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 소비를 줄이라니,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측면이 있다.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서는 소비가 경제활동 유지의 한 축이다. 그래서 소비주의와 그것을 부추기는 광고와 광고를 실어나르는 TV는 한묶음이다. TV와 TV 속의 광고에서는 소비는 절제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덕이 된다. 광고는 욕망의 동질화를 선전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끊임없이 세뇌한다. 자본주의 경제는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이 되는 물건을 생산하며, 광고를 통해 판매한다. TV는 스스로 즐길 줄 아는 능력과 대화와 독서의 재미를 빼앗아갔다. 경기침체기에 있어서 정부의 여러 정책의 본질은 소비를 부추기기 위한 것이다.
불교는 욕망의 여읨을 가르친다. 담마파다에서는 “이 세상 누구든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면 마치 연꽃에서 물방울이 굴러 떨어지듯 모든 고통이 그로부터 사라진다”고 했다. 불교뿐만 아니라 세계종교의 반열에 오른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그러하다. 한번 살펴보자. 기독교 -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마태복음). 유교 - 지나침도 부족함도 모두 잘못된 것이다. 힌두교 - 아무런 갈망 없이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사는 사람은 평화를 얻는다(바가바드 기타). 이슬람교-가난은 나의 자랑이다(마호메트). 유대교 - 제게 가난도 부도 내리지 마십시오(잠언). 도교 - 자신이 충분히 가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부자이다(도덕경).
소비를 줄이는 것은 욕망의 적절한 제어이다. 위대한 성현들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은 개인적인 각성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사회적인 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소비주의와 TV, 광고의 유혹을 단절시키는 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그것의 기초는 민주주의에 대한 바른 이해와 경제민주화라고 더글러스 러미스는 말한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지금의 민주주의와 조금 다릅니다. 회의가 느껴져서도 안 됩니다. 교과서를 펴보면 대의제가 있고, 언론의 자유가 있고, 헌법이 있다는 등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있으면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민이 실제로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라는 것은 그 정의에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 경제제도를 민주화하는 과정의 첫걸음은 경제적인 결정이라고 말해지는 정책결정의 대부분이 실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이 결정, 정책은 정치적이라고 말하는 경우, 그것은 전문가의 결정 사항이 아니라 보통의 시민, 인민이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변함없이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어 오고 있다는 역사적 결정론이 아니라 선택은 가능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정치적인 선택이며 민주주의적 선택이라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들 각자 스스로가 소비주의와 TV, 광고로부터 우리의 오래 된 미덕을 지키기 위한 주권의 행사, 이것은 민주주의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의 권리이며, 나아가 권리이기 이전에 의무라는 것이다.
광고에 대한 더글러스 러미스의 지적 또한 광고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상업광고를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근이라든지 콩이나 두부에 대한 상업광고는 없습니다. 상업광고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쓸 데 없는 것을 사도록 설득하려는 것으로, 텔레비전의 상업광고에 나오는 상품은 사지 않는다는 큰 규칙을 따르면 거의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