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려서 울산에서 살던 나의 별명은 ‘햇노인’이었다.
이미 서너 살 때부터 어른들하고만
가까이 하고 또래 아이들과 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에게 ‘원효 대사와 같은 도인이 되어서
사내 값 좀 하자’는 얘기를 들으면
그리 구수하니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른들의 말씀이,
‘그런 대사를 만나려면 고기도 술도 먹지 말고
밥도 반 그릇 먹으면서 원을 세워야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섯 살 때부터 열아홉에 집을 나올 때까지
고기와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밥도 반 그릇씩만 먹으며 도인을 만나려는 일념으로
살았으니 꽤나 독특한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낸 셈이다.
손에 마디가 굵게 생길 만큼
일곱 살부터 밭 매고 나무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엔 노인들에게
도인들 얘기를 들으며 성장하면서 몇 번이나,
원효 대사와 같은 도인을 만나러
집을 나가려는 시도를 했으나
식구들이 말리는 바람에 주저앉아 있다가
열아홉이 되어서 선친이 작고하자
집을 나올 결심을 굳혔다.
그런데 문제는 백형의 심한 반대였다.
사남매의 막내인 내가 집을 나간다니
쉬이 허락을 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출가하지 않고 돌아가신 후
나가면 내가 이 동네에서 눈 뜨고 다닐 수 없으니,
날 죽이고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내가 굽히지 않으니, 백형의 말이,
‘각서를 쓰고
동네 어른들에게 도장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우리 동네에 열세 분의 학자가 살았는데,
그분들을 찾아가 일일이 설명을 드리고
도장을 받고 나서야 집을 나올 수 있었다.
어렵게 이뤄진 출가였다.
중이 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원효 대사 같은 도사를 만나
도를 배워 영웅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집을 나와 일 년을 다녀도
그런 도사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형편없는 거지가 되어
전국의 절이란 절은 다 헤매고 다녔고
마실에도 다녀보았지만 도인을 만날 수가 없다가
어느 날, 지나는 중을 붙들고
‘도사 어디 없느냐?’ 하고 물으니,
‘범어사에 가면 도사가 있다’고 했다.
귀가 번쩍 뜨여 범어사로 달려가
절 안에 들어서자 마자 고함을 질렀다.
“이 절에서 제일 큰 중 나와라.”
서른 명은 족히 될 중들이 달려나왔다.
그리곤 안하무인으로 그리 소리쳐대는
나를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절 안이 떠들썩해서 그랬는지,
그야말로 큰 중 하나가 나와서
나를 떠억- 쳐다보더니만 물었다.
“총각, 큰 중은 왜 찾았는고?”
내가 즉시 고개를 들고 당돌하게 말했다.
“예, 제가 원효 대사 같은 도사를 만나려고
전국 절로 일 년을 헤매고 다녀도
그런 도사는 제 눈에 한 놈도 안 보였습니다.
산 좋고 물 좋은 데에
고대광실을 지어놓고 놀고 먹고 사니,
전국의 사람들이 모두 절로 와 놀고 먹고 살면
어느 놈이 시주를 가져다 주겠나 이해가 안 갑니다.
그리고 전국민이 다 여기 와서 놀고 먹으며
아이를 낳지 않으면
백 년 안에 우리 나라는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문제를 오늘 저에게 납득시키지 않으면
몽둥이를 하나 들고 전국의 중들 다 때려죽이고
전국의 절들을 다 불살라 버리겠다는
각오가 서 있습니다.”
아마도 오만한 스님 같았으면
그러한 당돌한 어린 총각의 말에
‘이놈의 자식, 건방진 놈…’ 하고 쫓아냈을 텐데,
그날 그 스님은 한나절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어린 청년에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서
그랬을 터인데, 나는 나 나름대로
그때 생각이 바뀌어 버렸다.
‘에라, 이제 도사 찾기는 틀렸구나’ 생각하고,
‘제일 큰 산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천성산이 제일 큰산이라’고 했다.
큰산으로 들어가 풀만 먹으며
힘을 키워 영웅이 되리란 생각이었다.
무나 풀만 먹고 사는 소가 온갖 짐승을
잡아먹는 호랑이와 싸워서 이겼다는,
어릴 때 어른들에게 들은 말씀이 생각났던 것이다.
호랑이를 잡아먹는 소 같은 영웅이 되려면
풀만 먹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내원사를 찾아가
‘제일 높은 암자가 어디냐’고 물으니
‘조계암’이라고 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일 년을 돌아다녔으니
모양새는 형편없는 거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도를 이루어
영웅이 되려는 일념으로
당당했고 정신은 또렷했으니 거칠 것이 없었던
내가 조계암에 이르러
‘주장대사, 주장대사’ 하고 부르니
우리 스님이 문을 열고 나왔다.
암자의 주지를 하면서
수도하며 고생하고 살고 있던
우리 스님과의 만남이 그렇게 이뤄졌다.
비로소 진정한 출가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인연이
우리 스님과 만나면서 싹을 틔웠으니,
도의 길에 있어 누구나 그러하리라마는,
나 또한 스승을 그렇게 필연적으로 만난 것이다.
나의 스승인 성암性庵 스님은
열한 살에 속가에서 사서삼경을 떼고
한학에 도통하여 스물한 살에 출가한 분이다.
나중에 해방이 되어 통도사 회의에서
남방 제일 선원이라 일컬었던 내원사 주지를
임명할 만큼 신망이 두터웠고 실력이 출중했다.
내원사 주지살이를 할 때
논 240마지기를 농사지으면서
칠십여 명의 대중들과
오전 오후 두 시간 이상 일을 하고 살아,
그후 토지개혁 때도
토지를 뺏기지 않을 만큼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고 일하면서
도를 닦아야 한다는 소신이 뚜렷했던 분이다.
스님의 밑에서 살며 소화제를 사먹는 날엔
‘저놈, 시줏밥 얼마나 먹었으면 소화제를 먹느냐’고
석달 열흘간 욕을 먹었고,
만약 낮에 어쩌다가 등을 방바닥에 대었다가는
‘저놈, 뱀 봐라’ 하며
석달을 따라다닐 만큼 철저했다.
일타 스님과 일각 스님이
우리 스님에게 글을 배웠는데
당시 낮에 누워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예순이 넘어 열반에 드실 때도
당신이 갈 것을 이미 알고
사흘 동안 공양을 물린 채 좌선을 하다가
곁에서 함께 좌선을 하던 내 손을 잡고 돌아가셨으니,
도인 중의 도인이었던,
나의 출가의 문을 열어주고
정신을 다듬어준 스승이었다.
주장대사를 찾으며 해후한 그날부터
정확히 일 년 동안
우리 스님은 나를 그냥 내버려두었고,
나는 나대로 일절 다른 것은 입에 대지 않은 채
여름엔 풀을 뜯어먹고 겨울엔 가루를 낸
풀잎가루를 물에 타먹으면서
나무를 해다 불 때면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스님이
‘여보게, 여보게’ 하고 불러서
문을 열고 나가니 비로소 물었다.
“자네 뭐하러 여기 왔는가?”
“호랑이 잡을 영웅이 되러 왔습니다.”
“역대 영웅호걸치고 무식한 놈 없으니
글 한번 배워보게.”
애초에 글을 배울 생각도 없었으니,
‘나는 그런 것 하러 온 사람 아니오’라면서
떠나려고 하는 나를 스님이 한나절을 붙들었다.
글을 볼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으나
남의 집에 일 년을 살았는데
주인어른의 말을 무시하기가 미안해서
‘석자만 배우겠습니다’ 하고 물러앉았다.
예나 지금이나 내 고집이 그만큼 세었다.
우리 스님이 ‘아, 고맙구먼’ 하시더니,
바로 〈초심初心〉을 가지고 와서
내가 모르는 얘길 자꾸 해주었다.
내가 잘 듣고 앉았으니까
‘아, 이 사람아 석자만 더 배워봐’ 하길래
해롭지 않은 것 같아 또 석자 더 배우고 하다가
한 시간 만에 〈초심〉을 한 권 다 배웠다.
그리고 나서 한나절 시간을 주면서
배운 것을 외워 바치라고 해서
한나절만에 다 외워 바쳤다.
일 년 동안 일절 간한 음식을 먹지 않았던 탓에
머리가 굉장히 맑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석자만 배우겠다는 나를
다음날 또 불러 앉히고는
‘한 권만 더 배워봐라’ 하면서
〈발심發心〉을 내놓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비로소 속복을 입은 채
결코 평범하지 않은 나의 행자생활이 시작되었다.
스무 살, 육십여 년 전의 일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