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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드러내어 비춰 보이다(傳神寫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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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이야기 그림 이야기 - 김현정 2004년 04월 266호
물은 거침이 없다.
작은 시냇물로 시작한 물줄기가 바다로 가고자 함에 있어 그 물길은 장애물을 만나면 곧 돌아가고, 빈 웅덩이는 채워 넘치기를 기다릴 줄 알며, 천애낭떠러지 폭포 따라 떨어지기도 마다지 않는다. 혹 먼 길을 돌아서도 가고 긴 시간을 기다리기도 하고, 험한 길목에선 차고 넘쳐도 그 길을 따라 흘러 흘러 바다까지 내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물의 미덕이다.
지(知)는 화살(矢)에 입(口)을 더한 것이니 말이 화살과 같이 빠른 것을 의미한다. 안다는 것은 활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주저함이 없는 것이므로, 머뭇거림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 마치 물길이 쉬는 바 없는 것과도 같다. 공안公案을 들어 답을 구하는데 주저함 없이 이를 파破하는 경지에서 지혜를 얻었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이치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산은 그침을 안다.
그리하여 산에는 풀꽃과 나무가 뿌리를 내리며, 꽃과 잎을 피우기도 한다. 온갖 뭇 생명이 걸음을 멈추어 그곳에 깃드니 그것이 걸음을 멈춘 산의 미덕이다. 산은 모든 생명을 섬김으로써 그들의 스승이 된다. 이것이 덕이요, 인仁이다.
물은 흘러가기를 수억만년이요, 산은 수억만년의 걸음도 멈추게 한다. 그러므로 지혜는 흐르는 물과 같이 거침이 없으니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한다(樂水) 한 것이요, 인仁은 멈추어 설 때를 알아 세상 만유를 섬기고 품으니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樂山) 한 것이다.
어느 날 조주 스님께 스님의 진영眞影을 그려 바친 일이 있었다. 당장에 스님이 말씀하시길 “만일 나를 닮았으면 나를 때려죽일 것이요, 닮지 않았다면 당장 불살라 버려라.” 하였다.
예로부터 초상을 그릴 때는 그 정신을 드러내어 비추는 것(傳神寫照)을 으뜸으로 삼았다. 얼굴에 드러난 그 사람의 정신과 마음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하물며 그것을 그려 전하기는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려 바친 진영이 닮았을 경우는 그림에 도심道心이 드러남을 이야기한 것이요, 닮지 않은 경우는 그 정신이 그림에 드러나 있지 않은 경우를 말함이니, 자고로 도심道心은 입을 열어 전하기 어렵고 그림은 그 정신을 담아 전하기 쉽지 않다.
진심으로 통하는 마음은 긴 말이 필요 없고, 지극한 도는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듯, 그 정신을 드러낼 때 반드시 많은 붓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감필減筆의 묘미이다. 선화禪畵가 지향하는 바가 바로 절제와 간결함이다. 클리브랜드 박물관 Cleveland Museum에 소장되어 있는 <보리달마도菩提達摩圖>는 붓질의 간결함과 먹(墨)의 절제를 모두 담고 있는 작품이다. 그림의 작자는 알 수 없으나 불과 수 회의 붓질과 얼마 안 되는 먹을 통해 달마 조사의 기품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달마 조사가 중국으로 건너온 지 9년째 되던 해, 대사는 다시 인도로 돌아가려 함에 있어 제자들을 불러 모아 물었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너희들이 얻은 바를 말해보라.”
도부道副가 대답하기를 “문자에 집착하지 않으나, 문자를 떠나서도 안 됩니다.”고 하니
조사께선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 하였다.
총지總持가 답하기를 “아난이 아촉불의 국토를 한 번 보고는 다시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고 하니 이에 “너는 나의 살을 얻었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도육道育이 말하기를 “사대四大가 공空하고 오온五蘊이 있지 아니하므로 한 가지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고 답하였다.
마지막으로 혜가慧可는 대사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는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사께선 감탄하며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고 하며 “석가께서 진리를 가섭에게 전한 후 점점 나에게 이르렀다. 이제 그 진리를 너에게 전한다.”고 하며 법맥이 이조 혜가로 이어졌다. 지극한 도는 말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담을 수 있음을 보여준 예이다.
그림에서 갈대 잎에 의지한 달마의 꽉 다문 입은 그 침묵을 보여주며, 지극한 눈빛은 수많은 웅변을 드러낸다. 가사를 둘러쓰고 갈대 잎에 의지한 달마 조사의 모습은 남송南宋 이래로 전형적인 달마조사상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전형적인 도상이 그러하긴 하나 성긴 붓질과 메마른 먹에서 오히려 빽빽함이 느껴지는 것은 잘 짜여진 그림을 볼 때 또 하나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회화의 소밀疏密 이치가 이 작품 화면 전체에 배어 있다.
관서款書가 없으니 누구의 작품인지를 알 수 없다. 다만 능하지 않은 붓질로 보아 전문적인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어느 선승禪僧의 여기餘技쯤으로 생각된다. 작품의 제작 시기는 화면 상단에 요암 청욕了庵淸欲(1288~1363)의 제시를 통해 늦어도 원元대를 내려오지는 않겠는가 싶다.
지자知者는 말이 없고 말하는 자(言者)는 알지 못한다고 한(知者不言 言者不知) 말도 전해지거니와 말없는 그림 한 장이 참 많은 말을 담고 있다. 달마 조사께서 갈대 잎에 의지하여 강을 건너 소림에 안착하였으니 여기에 물과 산의 이치를 담았고, 그 지혜와 덕은 지금껏 면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