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바람이 이제 차지 않다. 창문을 열고 턱을 괴고 괴목나무 넘어 바다를 바라본다. 물결도 일지 않는 바다는 평화롭다. 창을 열면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나는 해가 서산에 걸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창을 열고 바다를 바라본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바다와 나 사이의 거리를 일을 마친 목수가 스쿠터를 타고 내려간다. 작년에도 일을 하고 올해도 일을 하는, 마을에 사는 초로의 그는 어쩌면 절의 전속 목수가 된 것만 같다. 젊어서는 일거리를 찾아 전국을 떠돌았다지만 이제 환갑을 넘은 그이에게는 절의 일만이 있을 뿐이다. 스쿠터를 타고 내려가며 그가 인사를 한다. “스님, 계셨시유. 뭐 하는 데 오늘 하루 종일 얼굴 한 번 뵐 수 없었데유. 오늘 밭 있는 데 집 한 채 짓고 가는 길이구만유.” 그는 소리쳐 말하지만 내게는 아주 작게만 들린다. 나는 귀 기울여 그의 소리를 들으며 소리쳐 대답한다. “어디다 집을 지었어요? 이따가 가 볼게요. 잘 가세요.” 그의 웃음소리에 담배 냄새가 풍겨 오는 것만 같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나는 그가 지었다는 집을 둘러보기 위해 둔덕 너머 밭가로 향했다. 절에 사는 이 처사와 그리고 스님과 함께 뒷짐을 쥐고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느리지만 따뜻하게 와 닿는 봄 햇살처럼 저녁 포행의 한가로움이 문득 행복으로 와 닿는다. 이 처사는 농사에 밝고 이 절 주지스님의 상좌는 야생화와 새에 해박하다. 스님은 길을 걸어도 그냥 걷지 않는다. 파릇한 풀잎이나 야생화의 조짐이 보이면 손으로 낙엽을 헤집고 꼭 확인을 한다. 목수가 집을 지었다는 밭으로 가면서 우리는 산자고 머위꽃 현호색을 보았다. 모두 눈 밝은 스님이 발견한 것이다. 야생화의 이름과 모양을 익히면서 자연에 깃들어 산다는 것은 이렇게 꽃과 풀과 나무와 새와 더불어 이름을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리지만 예쁜 꽃들, 그것은 어쩌면 봄 햇살의 얼굴들만 같다. 여리고 약해 향기는 없지만 가까이 코를 갖다대면 하늘의 향기가 가득히 배어날 것만 같다. 꽃들을 보면서 세간을 등진 옛 선인들의 은둔의 즐거움을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밭에는 목수가 지었다는 집은 보이지 않고 비닐하우스가 덜렁 한 채 있을 뿐이다. 집이 어디 있어, 하는 내 물음에 집이 여기 있지 않느냐며 이 처사가 웃는다. 이제 상추도 오이도 곰취도 여기 살 것이니 이곳이 바로 야채들의 집 아니고 무엇이냐는 이 처사의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 한 채 지었다는 목수의 말이 왠지 따뜻하게 다가온다. 사람이 사는 집이나 야채들이 살 집이나 정성은 똑같이 들였다는 목수의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야채들의 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는 서서히 노을이 내리고 있다.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노을이 내리는 바다를 끼고 나있는 그 길을 나는 천천히 걸어 창이 있는 내 방으로 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