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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환경활동이 던지는 가장 큰 의미는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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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해인 2004년 01월 263호
지난해 불교계의 가장 큰 관심사는 단연 ‘환경’이었다. 사회적으로도 환경은 이라크 파병과 대선자금 문제와 함께 주요한 이슈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새만금 갯벌의 생명 평화를 위한, 전북 부안 해창갯벌에서 서울의 광화문에 이르는 수경 스님의 3보1배 정진, 천성산을 지키려는 지율 스님의 38일과 45일간에 걸친 목숨을 내건 단식기도정진, 북한산 국립공원 관통도로 반대활동이 1년 내내 지면을 채웠다. 수많은 불자들은 불교의 환경활동에 참여하고 지원했으며, 두 스님의 육신의 안위를 함께 걱정했다. 우리를 감동케 했고, 때로는 한없이 부끄럽게 했던 한 해를 보내고 맞이하며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해 새로운 해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환경활동은 연기와 자비의 구현
불교와 스님들이 왜 환경활동의 중심에 서지 않을 수 없는가, 이에 대한 의문을 먼저 풀고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르치신 핵심 내용은 연기緣起와 자비慈悲이다. 이에 따르면,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과 온갖 미물도 당연히 ‘나’를 형성하는 또 다른 나이다. 따라서 자연과 온갖 미물은 자비를 베푸는 대상이기 이전에 귀히 여겨야 할 ‘우리’인 것이다. 경전에서는 우리 사람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즉 딱딱한 성질(堅固性)과 축축한 성질(濕潤性)과 따뜻한 성질(溫暖性)과 흐르는 성질(流動性)의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직접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사람의 몸은 흙과 물과 불과 바람, 네 가지 요소가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 원소가 부족하거나 없어 조화를 잃으면 101가지의 병이 생기고 …” (《불설오왕경》)
나아가 적극적인 생명살림을 권고하고 있다. “모든 흙과 물은 다 나의 옛 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다 나의 본체이다. 그러므로 항상 방생을 하고 세세생생 생명을 받아 항상 머무르는 법으로 다른 사람도 방생하게 해야 한다.” (《범망경》 <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 제10>)
그러나 지금까지는 환경의 문제에 대해 멀찍이 떨어져서 벌어지는 우리와는 무관한 남의 일인 양 너무나 무심했다. 입으로는 불자입네 하면서도 실제 생각과 행동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제서야 환경 문제의 본질을 파악한 몇몇 스님들의 몇 마디 언사로는 표현하기 힘든 처절한 호소와 불교환경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연기와 자비의 가르침에 한 발짝 다가가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교의 환경활동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현하는 거룩한 신앙행위이며, 나아가 가르침 그 자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다시 새롭게 확인했다.

환경갈등은 조화로움 위한 과정
또 하나 정리할 것은 환경의 문제가 우리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가는 갈등인가라는 것이다. 그냥 의견을 달리하는 정도가 크기 때문에 갈등이라고 치부한다면, 이는 단견이며, 갈등을 통해 어떤 교훈도 얻을 수 없다. 어떤 내용의 갈등인가를 알아내야 한다. 환경문제로 발생한 갈등은 대형화와 속도의 빠름,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제1의 가치로 여기는 개발주의와 연기와 자비를 중심으로 삼는 불교의 가치가 충돌한 것이다. 미물을 포함한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과정의 불가피한 진통이다.
그런데 이 갈등이 쉽게 진정될 것 같지는 않다. 자연환경과 생태계, 문화유산에 미치는 악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무모한 도로건설 계획이 추진되는 것은 정권과 정부관료, 건설업자로 짜여진 ‘개발연합’의 이득 유지와 확대 때문이다.
노무현정부 들어서도 개발연합에 의해 짜여진 제4차 국토계획과 이에 따른 도로정책은 재검토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공공교통을 확충하는 정책은 뒤로 하고 도로로 인해 국토가 바둑판처럼 촘촘히 조각나는 도로건설 정책으로 치닫고 있다. 노무현정부의 환경정책이 개발을 하되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한다는 환경관리주의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탓도 있겠지만, 노무현정부가 개발연합의 한 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과의 공생을 추구하는 불교와 개발연합과의 갈등은 앞으로도 계속 빚어질 수밖에 없다. 다만, 그 갈등의 양상이 북한산 국립공원 관통도로나 금정산·천성산을 꿰뚫는 경부고속철도 건설사업 반대 활동처럼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을 것인가, 물리적 충돌이나 협의를 통한 또는 사법부 판결에 의한 해결이냐, 장기적이냐 단기적이냐 등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성찰, 새로운 해의 출발점
지난 한 해 동안의 환경활동을 돌아보며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사부대중의 성찰이다. 우리들의 호소가 거룩했지만, 때론 지금 우리가 너무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고 있으며, 너무 편한 것만 추구하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어서 공허했음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개발주의자들에게 환경친화적으로 변화하라고 촉구하고 요구했지만, 우리의 사는 모습이 그들과 무엇이 다른가. 한마디로, 대웅전 앞까지 닦여 있는 포장길에 자동차가 굴러가고 있고, 대형·물량주의를 부추기는 사찰의 건축행위가 불사라는 이름에 기대어 그치지 않고 있다. 씀씀이는 국민평균의 크기보다 너무 크다. 국민소득 1만불 시대에 가난 때문에 목숨을 끊는 일이, 심지어 가족 전체가 죽음으로써 빈곤의 고통을 벗어나는 우리 사회에서 불교인, 특히 수행자가 배부르고 등 따습다는 것은 죄악이 아닐까. 이에 대해 가슴 치는 성찰이 없다면 모두 헛것이다. 연기와 자비도 경전과 법문 속에서나 존재하는 한낱 구호일 수 있다. 그래서 지난 해의 불교환경활동이 던지는 가장 큰 의미는 ‘성찰’이다.
성찰은 불교인, 수행자이기 때문에 도덕적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키재기’식이어서는 안 된다. 욕망을 무화無化하는 보살이어야 한다. “근원적인 인식의 전환과 구체적 실천은 연기에 대한 사무친 통찰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난 보살적 인간에 의해서 가능한 일이다. 보살적 인간, 이타적 인간은 ‘나의 욕망 공간의 확장이 남의 욕망 공간에 대한 장애(희생, 피해)를 최소화(현실적 인간) 내지 무화(보살적 인간)시키는 인식의 틀’인 연기에 대한 통찰 위에서 새롭게 태어난 인간인 것이다.” (고영섭, 《연기와 자비의 생태학》 연기사 p8)
환경 문제의 원인이 대량생산 대량소비 즉, 욕망의 극대화에 있고, 그 결과는 자연의 파괴와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조화로운 관계의 파괴로 나타나므로 해결 방안은 연기에 바탕한 세계의 인식과 자비의 실천, 곧 보살행이다. 따라서 보살을 지향하는 성찰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