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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하여 태어난 인재는 없다 필요하다면 길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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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기획순례 - 현진 2004년 01월 263호
-인재교육의 산실 대만 불광산사 순례기-

2547(2003)년 9월 15일 해인사 1029일 영가천도 스무번째 49재 기념 초청법회에 불광산사의 개산開山법사 성운 큰스님을 모신 인연으로 문화교류협정을 체결하고 양국 사찰이 다양한 문화교류를 통하여 협력관계를 가질 것을 약속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두 사찰은 상호방문을 정례화하기로 하였고 이에 2003년 12월 3일부터 3박 4일간 일정으로 불광산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방문단 구성은 세민 스님(해인사 주지)을 비롯하여 송월(우화당 원로) 정원(우화당 원로) 노장님과 원택(백련암 감원) 원각(원당암 감원) 종성(홍제암 감원) 중천(용탑선원장) 등 대덕스님, 그리고 순민(총무국장) 종본(교무국장) 현종(재무국장) 현진(포교국장) 현조(호법국장) 관암(대장경연구원 보존실장) 원철(월간해인 편집장) 원직(회계) 이정근(관리과장) 노재정(총무과장) 등 종무소 소임자 등 20여 명이 일정을 함께 하였다.

2547(2003)년 12월 3일
여행은 언제건 어디건 설렘으로 다가온다.
비행기가 타이페이 공항에 도착하였고, 한국보다 기온이 높은 탓에 두루막을 손에 들고서 트랩을 빠져 나갔다. 갑자기 앞서가던 스님들이 두루막을 입기 시작했다. 불광산사 성운 노장님이 진노랑장삼을 입고 검은 염주를 목에 건 모습을 한 채 미소 띤 얼굴로 마중을 나와 계셨기 때문이다.
그 곁에 공항의 출입국 관리국장을 지냈다는 거사님이 우리 일행을 귀빈실로 안내했다. 스님들의 출입국 편의를 제공해주는 돈독한 불자였다. 해군중장 출신으로 출입국관리국에 근무할 때는 정부기관 내에 최초의 불자회를 만든 분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군인정신으로 출입국관리국을 운영하다가 불광사 성운 큰스님을 만난 이후로 불교정신으로 운영할 만큼 인생관에 변화가 왔다고 했다.
정원 노장님이 “두 분의 인상이 너무 좋아 사람들 많이 따르겠다”는 덕담을 했다.
성운 대사는 찻잔을 들고 있을 때 손이 떨리는 것을 제외하면 팔순에 가까운 나이를 잊고 사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의 모든 일은 잊고서 따뜻한 대만에서 편안하게 쉬시다 가시라”고 하니, 종본 스님(교무국장)은 “한국은 추운데 따뜻한 남쪽나라로 초청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대어對語했다.
통역인 이인옥 보살님은 현대사회 속에서 불교가 어떤 모습으로 사회와 융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이번 초청방문의 키워드라고 했다. 불광산사는 불교의 국제화를 위하여 오대주 대도시마다 대단위 불교사찰 건립의 원력을 세우고 현재 전세계 200군데에서 포교당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의 일임을 일찍이 간파하시고 인재를 양성해왔다고 귀띔해주었다.
“나를 위하여 태어난 인재는 없다. 내가 필요하다면 길러서 사용한다.”
그러나 우여곡절도 많았다. 병원을 세우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뒷바라지하면서 의학박사를 두 명이나 길러냈는데 공부가 끝나자 모두가 당신 곁을 떠나가 속가로 가버렸다고 했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섭섭했다고 했다. 그래도 다시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설사 배신을 할지라도 사람은 계속 키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수행과 살림살이 그리고 사상에 공감하는 출가자 재가자들이 계속 모여들었고, 이들이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어 결국 오늘의 불광산을 만들었던 것이다. 특히 출가자들이 많이 모여들도록 만든 것이 개산주開山主의 참 카리스마요 진정한 매력이었던 것이다.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탔다. 노장님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국내선 환승구까지 바래다 준다. 당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양옆으로 팔짱을 끼고 우루루 몰려들더니 사진을 찍기 위하여 포즈를 주문하니 그 특유의 미소로 모델이 되어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대만에서는 불교신도는 물론 일반 국민들도 스님에 대한 존경과 예경이 불교국가답게 극진했다. 우리 일행은 공항의 귀빈실에서 이구동성으로 한국에서의 공항출입이나 공공 장소에서의 스님들에 대한 예우문제를 이야기 삼고 있었다. 분명 개선되어야 하겠지만 한국불교의 대사회적 역할과 책임의 반성이 먼저 전제되어야 하리라.
하늘에서 보는 까오슝(高雄)은 부산항을 연상시킨다. 컨테이너를 실은 배들이 부지런히 오간다. 이미 수년 전에 국민소득 ‘2만달러’시대를 열었다고 한다.
고웅공항에 도착하니 100여 명의 사부대중 환영인파가 불교기를 흔들고 꽃다발을 목에다가 걸어주었다. 불광산사행 버스에 올라 손을 흔들었다. 현진 스님(포교국장) 특유의 바지런함과 순발력은 여행일정을 더욱 매끄럽게 만들어준다.
대중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대웅전에 도착하여 칠정례七頂禮와 축원 그리고 반야심경으로 부처님께 우리말 의식을 올리고 대만 일정의 무장무애를 기원했다. 세민 스님의 청아한 염불소리가 대웅전에 가득 울려 퍼졌다.
이곳 스님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잘 웃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친절하다는 것이다. 이인옥 씨는 성운 노장님의 인간관의 반영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누가 흑백TV를 좋아하겠는가. 칼라TV를 좋아하는 것은 표정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표정이 밝아야 한다. 표정이 없으면 그것이 바로 경전에서 말하는 비인非人이다.”
그리고 또한 성운 스님의 불교관은 ‘불교의 사회화, 깨달음의 일상화를 지향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스님의 수행철학은 ‘승랍과 깨달음의 척도는 곧 자비심과 보현행’이라고 끊임없이 설파하신다고 했다.

그날 저녁 성운 노장님이 만찬을 주재하셨다.
“지난 9월 25일 1029일 영가천도법회에 참석했을 때 한국신도들의 또록한 눈망울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 인연이 오늘까지 이어지니 참으로 세상일은 인과가 분명함을 알게 한다. 내가 중국대륙에 갈 수 없었을 때 오래 전부터 한국을 몇 번 방문했다. 그곳에서 옛 중국의 총림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삼보사찰인 통도사 송광사 해인사를 찾았다.”는 말에 분위기가 조금 숙연해졌다. 이어서 특유의 여유와 농담이 던져졌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한국 출신 승원 스님에게 한국말로 불광사 생활을 소개토록 했다. 혹 한국말 잊어버릴까봐.”라고 하여 좌중을 웃음바다로 바꾸어놓았다.
수덕사 출신이라는 비구니 상묵 스님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를 모두 평등하게 대해준다. 공양도 어른이나 평대중이나 모두 평등하다. 그것이 불광사의 매력이다.”라고 한마디 더 거들었다.
세민 스님(해인사 주지)은 “대만 불광산사를 일찍 오지 못해 유감이다. 한국 역시 주5일제로 인하여 재가자들이 산사를 찾을 일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우리도 여러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그 방편의 하나로 신행문화도량 건립을 준비하고 있다. 혈혈단신으로 중국대륙에서 대만으로 건너와 이렇게 큰 불사를 이룩하셨다. 재정에 관한 노하우가 있다면 공개해주시기 바란다.”고 속내를 내비쳤다. 아마 불광산사를 방문하는 사람의 십중팔구는 이것을 물었을 것 같다.
이에 대하여 성운 대사는 이렇게 답변했다.
“사실 나는 재무사정을 잘 모른다. 없는 것도 있다고 믿으면서 살 뿐이다. 인건비 외는 아낄 방도가 없다. 모든 일은 대부분 자원봉사자로 충당하고 있다. 그리고 내 개인뿐만 아니라 불광사 모든 대중이 신도 혹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시를 받으면 공금으로 자동 귀속된다. 그리고 불광산사 대중에게 개인적으로는 돈이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출가자가 검소와 청빈을 미덕으로 여기게 하여 재가자들에게 감동을 주도록 했다. 어차피 재정은 재가자의 몫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손해 보는 것이 버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사중을 운영해왔다. 내가 나가서 법회를 해주고 벌어온 것은 대중 모두에게 회향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사업(출판사업 등)과 교육사업이 우리 재정확보에 적잖은 도움이 된다. 그보다는 절의 재정이란 신도들이 마음을 내도록 해야한다는 점이다. 내 개인은 5달러 이상 가져본 적이 없다. 불광산만 좋으면 되는 것이지 내 개인은 거렁뱅이라도 상관이 없었다. 사중은 돈이 많아야 하지만 개인은 가난해야 한다. 중국본토에서 대만에 처음 왔을 때는 입을 옷조차 변변찮았다. 내가 소유에 집착하지 않으니 대중이 ‘큰 소유’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대신 대중과 개인이 불편한 것이 없도록 의료·복지 등 모든 것을 사중에서 공금으로 지원해주고 있다.”
세민 스님은 “해인사도 불광사처럼 운영하도록 노력해보겠다. 큰스님을 자주 찾아뵙고 여쭙겠다.”고 하니 성운 대사는 “별로 내보일 것이 없지만 나의 모든 경험을 해인사를 위해 내놓겠다.”고 화답하였다.
저녁만찬 도중 ‘이 음식도 한 비구니 스님이 자원해서 만든 것이다’라고 칭찬하고는 ‘내가 하면 더 맛있게 할 수 있다’고 하여 좌중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고 가신다. 물론 음식을 만드는 것도 포교실력 못지 않게 자신이 있다는 표현이시리라.
성운 대사는 18년 전에 주지직에서 물러나 현재는 국제포교의 원력을 세우고 중생이 원하는 곳은 어디든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서 법문한다고 했다. 《화엄경》에 ‘불청지우不請之友’라는 말이 나온다. 설사 부르지 않더라도 가야 할 자리라면 간다는 말이다. 이러한 대사의 활동을 도와주는 큰 힘은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는 국제불광회 조직이다. 모든 회원은 자원봉사를 원칙으로 한다. 자기사업을 하면서 신행봉사를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큰스님은 국제불교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는 혜안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젊은이에 대한 포교만이 불교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세계청년들에 대하여 혼신의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광대학도 신도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3년 동안 모아서 지은 것이라고 했다. ‘해인사와 불광사가 서로 힘을 합해 전세계를 불국토로 만들자’는 말씀에 박수가 쏟아졌다.

환영만찬이 끝나고 곧이어 여래전如來殿 대회당大會堂에서 환영회가 있었다. 일천여 명은 됨직한 인파가 1층과 2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갖가지 연주와 노래 등으로 우리를 감동시켰다. 그리고 ‘아리랑’까지 연주해주었다. 저많은 대중들을 기쁜 마음으로 동원할 수 있는 공동체의 저력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의심을 내내 떨칠 수가 없었다. 심정心定 스님(불광산사 주지)은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로 이번 환대를 표현했다.
세민 스님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인사말로 답례하였다.
“성운 대사께서 해인사 천도법회에 참석하시어 내린 법문은 아직까지 한국의 불자들에게 긴 감동으로 남아있다. 한국과 중화민국은 같은 대승불교 문화권이며, 같은 임제의 법손일 뿐만 아니라 한 국가 두 체제라는 동업同業을 가진 각별한 인연이 있다.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맞이하여 두 사찰은 상호교류를 통하여 세계문명의 한 축을 담당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환영식은 우리가 승려로서 이러한 행사에 익숙하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표현의 절제와 억눌림의 교육을 받아온 탓인지는 모르지만 예전의 ‘귀순용사 환영회’같은 장면을 연상시키는 일사불란한 그들의 손님맞이가 지나친 환대로 느껴졌다. 오고감이 편안한 선종가풍과 승가정신에도 맞지 않다는 생각이 또 다른 한편으로 들면서 감동과 충격이 교차했다.
숙소인 운거루雲居樓는 우리 해인사의 사운당四雲堂의 편액을 생각나게 한다. ‘사방에서 수행승이 운집하는 집’이 사운당이라면 그러한 ‘운수납자들이 머무는 집’이라는 운거루와 너무도 대구對句가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운당이 운거루요 운거루가 사운당인 셈이다. 잘 지어진 그리고 머무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해놓은 갖가지 시설들이 오랜만에 제대로 된 객대접을 받은 것 같아 마음이 흐뭇했다.

12월 4일
한국에서 위의를 갖추기 위하여 통일시킨 고무신은 결국 대만제 헝겊신으로 교체되었다. 아무리 전통과 위의를 지키려고 애를 써도 현실성이 없으니 오래 가지 못한다. 무리를 해서 굳이 지키려고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고통을 요구하고 또 억지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물 흐르듯 모든 게 자연스러워야 한다. 이튿날 아침 흰고무신은 노란 대만 헝겊신으로 바꾸어졌다.
운거루와 나란히 붙은 전등루傳燈樓는 불광산사 세계분원의 모든 스님과 공덕주 신도들이 본산을 참배할 때 쉬고 또 한담을 나눌 수 있는 공간 제공을 목적으로 지어진 집이라고 했다. 늘 언제 ‘본산’에 가더라도 ‘내 자리’가 있다는 믿음을 주어 자주 올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이 집이 세워진 목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현역에서 물러난 장로들의 연구 수행공간도 아우르고 있었다. 운거루의 주련은 불광산사의 지표를 잘 드러내고 있다.

불광보조삼천계佛光普照三千界
법수장류오대주法水長流五大洲
불광이 삼천대천세계에 널리 비추니
법수가 오대주에 영원이 흐르게 하네

전등회傳燈會는 불광산사 대중과 세계 25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1200대중을 장기적이고 제도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승가복지 기구였다. 이는 성운 대사의 감화력과 교단적인 인사제도, 그리고 사형사제간의 보이지 않는 질서 그리고 사중의 복지제도라는 4가지 요소를 융합하여 관리 운영되고 있으며 현재까지는 성공적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내 여기저기를 두루 살펴보고 오후에는 남화대학南華大學으로 갔다.
남화대학은 불교계 종합대학이라고 했다. 개방구조로 담이 없어 숲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학교는 대만돈 월 100원씩(우리돈 3,600원 정도) 3년 동안 모으는 ‘백만인 흥학興學운동’을 전개하여 세운 대학이다. 불교의 근본이념인 인간의 생활과 일생을 관리하는 분야에 집중 특화하여 육성 중이라고 하였다. 남화대학의 모든 것은 모든 이의 것이기 때문에 교육으로 환원한다는 이념에 충실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했다. 세민스님은 도서구입비 명목으로 금일봉의 공양금을 시주했다. 학교를 한바퀴 돌고 나오니 기부금 영수증과 감사장을 동시에 전달해주었다. 점심 때 찍은 사진을 저녁 때 뽑아서 돌려주어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도 또 다른 순발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모든 것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조직적인가 하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앞으로 아리산 쪽에 원주민의 고등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울 계획이라고 했다. 이는 대만 원주민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고 했다.
성운 스님은 “원력을 세운 보살의 환생”이라는 세민 스님의 표현처럼 한 사람이 한 생에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랄 따름이다. 돌아오는 길에 짙푸른 무성한 잎을 가진 아열대 나무 사이로 억새풀이 가을처럼 나부끼는 것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불광사는 사부대중이 화합하는 도량을 지향하고 있었다. 불교 원력을 가지고 평생 혼자 살 경우 출가하지 않더라도 동등한 대우를 해준다고 했다. 재가자일지라도 능력이 있는 사람은 한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출가자가 그 밑에서 일할 수도 있다. 특히 출가자들의 가족복지에도 신경을 쓴다고 했다. 그리고 이즈음은 독자인 경우가 많아 이들이 출가할 경우 노부모 부양은 사회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그 부모들을 사찰에서 만든 양로원에 수용한다고 했다. 그리고 출가가족의 천도재와 납골묘는 무료라고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그리고 일년에 한 번 출가자 가족들을 초청하여 ‘당신의 자녀가 이렇게 훌륭한 보살적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출가자의 집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만들어준다고 했다. 일종의 이미지 홍보인 셈이다.
저녁에는 운거루에서 좌담회가 열렸다. 역시 교육문제가 한국 중국 두 불교국가의 화두임을 증명해주는 자리였다.
불광사의 창건정신은 ‘문화·교육’이라고 했다. 복지 역시 문화와 교육이 가미된 복지라고 했다.
교육은 크게 승가교육과 신도·사회교육으로 나누어졌다.
먼저 승가교육의 중추는 불학원佛學院이었다. 사상적으로 불교교육을 통하여 수행자로 거듭나게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교육부 인가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대만에서 종교단체 교육기관은 교육부 소관이 아니라 ‘내정부內政部’ 소관이라고 했다. 교육부 인가는 불교 고유의 교육인 ‘참선’ ‘염불’ 등의 교과과정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인가를 받으면 승려가 ‘군사교육’을 받아야 하는 등 결과적으로 불교사상에 반反하는 국가교육 체계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교육부 소관인 인가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승가교육의 고유성을 살려가려는 의지가 새삼 돋보였다. 승가교육의 고유성 독자성 유지의 방편이 비인가교육기관인 셈이다.
신도 및 사회교육은 신도가 자식을 맡기면 유아원부터 대학원까지 일괄시스템으로 교육시킬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회사나 학교까지 찾아가는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적극성을 엿볼 수 있다. 현재 남화대학 불광대학 그리고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서래西來 대학을 세웠다. 서래대학은 중국인이 미국에 교육기관을 세운 최초의 경우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미국선교사들에 의하여 동양에 학교를 세우는 형태에서 불교도의 힘으로 미국에 학교를 만든 것에 대하여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남화대학 불광대학 서래대학은 언어적 요건만 충족되면 문화교류협정에 의하여 해인사 학승들의 무시험 입학도 가능토록 하겠다고 하였다. 교육사업은 신도들로 하여금 작은 보시를 꾸준히 할 수 있도록 해주며, 그리하여 큰 지혜를 일으키는 교육사업에 동참토록 유도하고 있는 불광산사의 중점사업이기도 했다.
혜전慧傳 스님(불광산사 도감)은 사중관리의 원칙을 예방우선주의라고 설명했다. 미리 예방하면 보수보다도 훨씬 예산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곳에는 선학당禪學堂이라는 선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1994년부터 선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대만에는 10여 곳이 있다. ‘선사禪師배출’이라는 원래 목적과 아울러 포교사 그리고 교육자의 자기 재충전을 위한 기회로도 동시에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교직자 선수련반’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는 어린이 경찰관 회사원 교도소 수감자 등에게 참선을 교육할 수 있는 선사禪師 양성이 그 목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국인을 지도할 수 있는 국제적인 능력을 갖춘 선사 교육과정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위한 지침인 〈불광선총서佛光禪叢書〉 간행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 본토와의 관계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우리의 통일 후 불교정책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원택 스님(백련암 감원)이 질문을 던졌다.
“현재 불광사에서 5명의 스님을 중국 본토의 각 대학에 유학을 보냈다. 목적은 현재 본토의 문화적 실태와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그 이후 중국불교와 어떤 관계를 가질 것인가에 대한 대비적 측면이 강하다. 중국 종교국宗敎局에서도 성운 대사의 높은 비중을 인정하고 본토에서 불지佛指사리를 모셔오는 것을 허락한 바 있다. 약 400만 명이 몰려들어 친견법회를 가지는 바람에 사회적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중국정부를 놀라게 하였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를 하였고 이것이 CD로 제작되어 현재에도 유통되고 있을 정도이다. 그외에도 양주 대명사 감진대학 기공식에 성운 대사를 초청한 바 있고, 하문 남보타사에서 대만불교의 대표로 성운 대사를 초청하여 불사를 주관토록 한 바 있다. 대륙수계산림에 심정心定 불광산사 주지스님이 참석하여 최초로 보살계를 설한 바 있다. 앞으로도 대륙불교와의 교류를 위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정치적인 민감성 때문인지 불광산사 주지스님 이하 모든 소임자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했다.

12월 5일
불광산사를 떠나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서 타이페이로 갔다.
이인옥 씨는 성운 스님이 ‘불광산사 대중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우리말로 번역해 읽어주었다.
“담낭수술을 받아 이제는 쓸개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말로 시작되는 올해 편지였다. 이 편지들은 매년 12월이면 발표된다고 했다. 이듬해 계획을 편지형식으로 전세계 불광신도들에게 ‘어떤 일을 해왔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이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성운 스님은 끊임없이 자기생각과 계획을 대중들에게 이야기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인간관계는 끈과 같다. 끈을 놓아버리면 연鳶이 날아가버리듯이 인간관계도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 남으면 개인시간으로 쓰지 않고 출가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재가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기신단다.
버스 안에서 심정 스님(불광산사 주지)은 계속 목캔디를 돌린다. 몸에 밴 자비심과 신생교단의 순발력 그리고 전통에 대한 경외심을 동시에 보는 듯 했다.
의양宜陽으로 가는 도중 통도사 방장 월하 대종사의 부음을 들었다. 올 가을 겨울에는 유난히도 많이 어른스님들이 돌아가시는 것 같다.
우리의 목적지 난양별원蘭陽別院에 도착했다. 기존사찰의 가람형식이 아니라 고층빌딩사찰이었다. 이곳은 불광산사의 입장에서는 특별한 곳이었다. 성운 대사가 본토에서 건너와 최초로 포교를 시작한 불광산사의 발원지인 초전법륜지였다. 그 당시에는 벽지로 가난한 곳인지라 포교 역시 쉽지 않았다. 노보살님들만 몇 명 나오던 것을 10여 년의 포교를 통하여 젊은이의 불교로 바꾸어놓았다고 한다. 합창단을 만들고 연주회를 가졌으며, 자전거를 타고 시골로 포교를 하러 다닌 곳이기도 했다. 그 자전거가 지금도 불광산사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올해가 포교 50주년. 그래서 보답하는 뜻으로 이곳에 불광대학을 설립하게 되었다고 했다. 불광대학의 총장은 여성이었다. 총장이지만 ‘스님들의 제자’라는 겸손함으로 인사를 했다. ‘사원의 학교화’가 성운 스님의 사상이기도 하다. 성운 스님은 스스로 ‘지구인’이라고 하여 세계화를 지향하면서도 지역주민도 함께 보살핀다는 의미로 이곳에 대학건립이라는 큰 선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곳은 학교인 동시에 인간불교의 도량이라는 것이다.
금광명사金光明寺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여장을 풀었다.

12월 6일
이 날 한참을 달려 타이페이로 갔다. 역시 빌딩사찰인 대북도량臺北道場에서 점심을 먹었다. 특이한 점은 식당 겸 강당이라는 점이다. 비행기 기내식을 응용한 공양법이 특징이었다. 이 역시 성운 스님의 창작이라고 했다. 즉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도 하고 아이디어도 내고 그렇게 하여 공양 한 끼도 다목적으로 이용함으로써 덤으로 시간까지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심포지움 즉 향연饗宴인 셈이다. 오랜 시간 담소를 나누며 함께 공양을 나누는 것도 좋은 추억이었다.
빌딩 안에는 방송국 신문사 출판사, 각종 미디어 제작뿐만 아니라 서예실, 무용실, 서점 등 갖가지 문화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일행이 불광산사의 이곳저곳을 돌아본 소감은 저마다 다를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민 스님께서 가는 곳마다 덕담 삼아 인사말에서 빼놓지 않은 “성운 스님은 대만불교를 위해 이 땅에 오신 불보살님의 화신”이라는 표현답게 짧은 시간에 이룩해놓은 각종 불사를 볼 때 한 개인의 원력이 얼마나 큰지 눈으로 직접 보고 감탄하면서도 부러움과 동시에 또한 걱정스런 마음이 다른 한켠에서 일어났다.
“성운 스님 이후 글로벌 불광산사와 ‘불광정신’의 존재는 가능한 것일까?”
세계적인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라는 책에서 세계사의 흥망성쇄는 ‘도전에 대한 응전’이라고 했다. 큰 도전 없이 연륜은 짧으나 교육과 사회복지에 매진하는 불광산사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성운정신’이 ‘불광정신’으로 정착되고 거듭날 때 가능한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또한 이번에 보고 듣고 느낀 것으로 해인사의 현재와 미래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해인사의 현재의 위치와 역할은 불광산사에 비하여 다소 미흡할지 모르나, 그 잠재력만큼은 훨씬 큼을 느끼게 되었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부침을 겪으며 이룩해온 1200년의 전통과 ‘해인정신’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무한한 보배로 더욱 돋보였다. 어떤 사상이나 조직은 때에 따라서 장점으로 작용하여 상승효과를 내지만 어느 시기에는 단점으로 환원되는 부메랑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현재 불광산사에는 개인의 다양한 개성과 능력이 절묘하게 어우려져 오직 ‘불광정신’으로 집약되어 일하면서 실천되고 있었고, 이것이 경쟁력을 더하여 세계화로 이어지고 있었다. 개인이나 조직에 있어 그 생명의 자연적인 순리는 다양한 개성의 표출과 개개인의 주체성 정립 내지는 분권화로 안착된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의 산전수전을 아직까지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불광산사가 이제부터 할 일은 하드웨어 부문보다는 소프트웨어 부문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물론 그들도 ‘글로벌 불광산사’답게 미래의 여러 상황에 대비하는 연구와 노력을 하고 있었다.
불광산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일행은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공항으로 갔다. 차 안에서 며칠 동안 계속 먹었던 과일 ‘연무蓮霧’가 제일 입맛에 맞아 그것부터 먹었다. 그리고 다니면서 가사장삼을 수해야 할 경우 두루마기와 겹쳐 입어야 하는데 이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두루막과 장삼은 어떤 형태이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것 같다.
불광산사에서 우리를 안내하고 통역해준 한국 출신의 젊은 학인 승원 스님 상묵 스님!
부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훌륭한 승려가 되시길.

12월 10일
삼박사일간의 일정 동안 심정 불광산사 주지스님과 동행한 탓인지 헤어질 때 무척 아쉬웠는데 이번에 통도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분들이 월하 큰스님의 다비식에 조문사절로 참여하게 되었으니 시절인연의 오묘함에 다시금 놀라고 말았다.
월하 대종사의 다비식을 마친 불광산사 심정 주지스님과 그 일행 5명이 해인사를 찾아 팔만대장경을 참배하고 조계종정이자 해인총림 방장이신 법전 스님을 친견하고서 하룻밤을 머문 후 대만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인연은 계속 맺어지고 또 발아해가는 것이리라.□

취재·정리/현진·관암·원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