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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깨달음, 그리고 삶과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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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이뭐꼬 - 법진 2004년 01월 263호
법진 / 해인강원 학감


내가 절 생활을 시작하던 초창기에 “경공부 많이 시키면 속퇴한다”는 말을 어른들로부터 자주 들었다. 서양의 신학교에도 이와 유사한 격언이 전해왔던 모양이다. “신학대학 학생들이 현대의 여러 사상, 특히 독일철학자들의 사상에 매료되지 않도록 지도할 것이고, 그리고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의 철학은 무엇인가?’하는 문제를 그들의 졸업시험문제에 반드시 출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말들이 종교권 내의 세대간의 대화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종교 수행자들이 알음알이를 추구하게 되면, 그리고 분석적인 독일철학에 맛을 들이게 되면, 수행과 성소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기 쉽다는 우려가 팽배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절에서는 책 안 보고 바로 참선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고, 유럽에서는 “칸트는 완전히 잘못된 철학을 했다”고 자신감 있게 -어떤 점으로는 무식하게 - 쓰는 것을 모범답안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앎과 깨달음은 그 내용을 본질적으로 달리하는 것인가? 분석적인 논리가 결국에는 개인의 성소를 파괴하고 마는가? 앎과 깨달음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공존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
나는 일년 동안에 걸쳐 <월간해인>에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연재를 하기로 되어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위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지는 이유는 정확하고 분명한 앎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적어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배심원이 법정에서 사건에 대해 유죄 아니면 무죄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에 답하기 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태도로 간단없이 논리적인 추구를 해나가야 할 것이고, 그리고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스스로 일찌감치 부정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종교 이론을 광범위하게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의문을 염두에 두고 주제에 접근할 것이며 주제의 이해를 위해 끊임없이 설명과 해석을 동원할 생각이다. 설사 내 앎에 반대되는 사례가 하나둘 있다고 하더라도, 환원주의적 이해의 태도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생각이다. 종교에 대해 정확한 앎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내 수행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갖고 싶기 때문이다. 앎이 가지는 가치는 그것이 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라는 단순한 사실보다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발견하고 수행의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데 있다.

종교의 정의
종교는 매우 본질적으로 매우 개인적인 것이므로 다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체계적인 이론으로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거나 몇 마디의 언어로 간단하게 정의해내기 어렵다. 지금까지 제기된 종교이론에 따르면, 종교란 뭔가 초자연적인 영역, 즉 신이나 영혼의 영역과 관련된 믿음 내지 행위로 구성된다는 것에 크게 이견이 없어 보인다. 일단의 그룹은 초자연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언어를 동원하여 종교를 영적인 존재에 대한 신앙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였고(E. B. Tylor, J. G. Frazer), 또 다른 그룹에서는 성스러움의 개념, 즉 신이나 조상, 그리고 기적과 같은 엄청난 업적을 이룬 영웅들의 영역을 가지고 종교를 정의한 바 있다(M. Eliade). 한편, 엘리아데에 이어,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개념을 배타적으로 거부하면서 사회적인 것과의 관련성 속에서 성스러움을 찾기도 하였다(E. Durkheim). 종교가 신, 특히 유태교 기독교 전통의 유일신적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 것으로 이해한 자들도 있다. 그들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이면에는 인간의 강박관념적 노이로제 또는 신앙의 아편을 필요로 하는 경제적인 불평등의 고통이 있다는 것이다(S. Freud, K. Marx). 일상적인 것의 이면 내지 배후에 존재하는 신비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기도 하였고(E. E. Evans-Pritchard), 인간이 경외하는 초자연적인 것보다는 윤리성에서 종교를 찾기도 하였다(C. Geertz).

이론의 유형
종교학자들의 종교에 대한 정의는 그런 대로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그들의 이론을 만들어갔는가에 대해 관심을 돌리는 순간부터 문제는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종교에 대한 합의도 일순간에 사라진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그들의 종교적 기질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종교에 대해 접근하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론을 논증해가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유형의 설명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사실·사건 또는 행위라고 할지라도 보는 자의 입장에 따라 다양한 전제, 방법, 그리고 논리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종교를 ‘기원학’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종교를 검토한 1800년대 후반의 연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원학 연구는 역사에서 발견되는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인간이 가지는 종교의 심리적인 또는 사회적인 기원을 추구해 나간 것을 말한다. 그리고 기원학 연구는 인류 문명의 초기에 일어난 어떤 특정한 사건을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적용하여 보편적인 사실로 이해하고자 한다. 과거에 일어났던 개별적인 사실을 두고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두루 존재하는 모든 인류의 공통된 특징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기원에 관한 연구자로는 막스 뮐러(Max Muller), 타일러, 프레이저, 프로이드, 그리고 뒤르껭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는 인류의 역사에 깊이 기억되어 있는 상징적인 사건, 예컨대 프로이드의 경우 외디프스 콤플렉스에 의해 아버지를 살해한 최초의 사건으로부터 긴 왜곡화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다. 인류 문명과 함께 종교도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형태의 신앙으로 점차 발전하였다. 따라서 기원학 연구는 인류의 사회적 진화 이론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초기의 사실, 가장 간단한 형태 그리고 가장 순수한 모습 속에서 종교의 기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문명사적 입장에서 보면, 원시적인 것은 거의 예외 없이 현대적인 것보다 열등한 것이지만, 이러한 ‘미숙한’ 것, ‘어린애 같은’ 것, ‘야만적인’ 것, 그리고 ‘미개한’ 것 속에서 문명이 진화해 나왔다는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사회 진화의 이론이 점차 여러 인류학적 연구에 의해 부정됨에 따라, 인류의 종교와 사회적인 삶에 대한 ‘가장 최초의 사건’은 그리 많은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지 추측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종교는 인간이 생존한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인간의 심리적인 필요나 또는 사회적인 환경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대안을 가지고 마르크스나 프로이드, 그리고 뒤르껭 등은 종교에 대해 기능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입장에서 이해하였다. 현대 과학적 세계에서 종교는 신앙이 가지는 이성적인 형태 또는 정상적인 신앙행위의 유형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러므로 왜 종교가 여태까지 존재하는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잠재의식적인 또는 비이성적인 어떤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프로이드에게 ‘어떤 것’은 ‘강박관념적 노이로제’였고, 마르크스에게 그것은 사회적인 갈등으로 인한 ‘자기 소외’였고, 뒤르껭에게 그것은 ‘사회’였고 그리고 개인에 대한 ‘사회의 강제적인 요구’였다.
환원주의적 이론에 반대한 일단의 학자들은 환원주의적 이론들이 애초부터 잘못된 전제 위에서 출발한 것이었다고 비난하였다. 엘리아데와 이반스-프리차드에 따르면, 종교는 원래부터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환원주의자들과 같이 잠재의식(무의식)적인 것, 사회적인 것, 또는 순전히 정신적인 것에 호소함으로써 그들의 가설을 논증하려고 한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한편, 모든 문화는 독특한 자기변명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고 본 기어츠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종교적인 사회들도 우리가 과학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과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고 보았다.
프로이드와 마르크스 등 대표적인 환원주의자들이 지난 세기 후반에 갑자기 몰락함에 따라, 이와 같은 반환원주의적인 태도가 점차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와 때를 같이하여, 타일러의 지성사적 이론이 우연하게 주목을 받았던 사실도 특기할 만하다. 그는 종교가 이성적이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을 대변하며 그리고 종교의 주된 목적은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의 이론을 둘러싼 논쟁은 기원학에서부터 환원주의와 반환원주의, 그리고 지성주의 이론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다.

이론의 범위
앞서 소개한 이론들은 대개 인간의 삶이 가지는 문제를 종교라는 창을 통해 살피고자 하였다. 그런 점에서 종교 이론은 앎에서 삶으로 나아가는 창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막스 뮐러, 타일러, 프레이저 등은 종교가 인류 역사 초기에 등장하여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현재와 같은 고등종교로 발전해왔다고 보았다. 타일러가 보기에, 미개인들의 영혼 숭배,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다신교 신앙, 그리고 보다 고차원적인 유일신교는 인류문명의 계단 위에 차례로 나 있는 역사적인 발자국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세련되지 못한 것들이 이성적인 것, 합리적인 것, 현대적인 것, 그리고 세련된 것으로 향상되어온 것이다.
프로이드, 뒤르껭, 그리고 마르크스 등 환원주의자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에 대한 전제들을 모든 종교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프로이드가 보기에, 인간의 일반적인 강박관념적 노이로제를 중심으로 한 개념이 창조주인 유태교-기독교 전통의 하나님이었다.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 노동자들은 천국에 대한 기독교적 열망을 가지고 있는데, 천국에 가면 신이 현생에 갖가지 고생을 겪어온 가난하고 죄없는 사람들 모두를 보상해줄 것이라는 아편을 가지고 있었다. 뒤르껭도 토테미즘이라고 하는 하나의 단일 종교를 모든 다른 종교의 범례로 인정하였다. 다시 말해서 호주 원주민의 토테미즘은 종교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그 요소로부터 모든 다른 종교가 나왔다고 믿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엘리아데는 이와 같은 환원주의적 종교 이해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였다. 그는 타일러와 프레이저의 진화론적 태도에 반대하면서, 모든 인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상징과 신화에서 성스러움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참으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고대건 현대건, 동양이건 서양이건, 단순하건 복잡하건 간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반스-프리차드와 기어츠는 모든 종교에 적용하고자 만든 환원주의자들의 이론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엘리아데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인류학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린 시대로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전 인류가 남긴 상징과 신화를 낱낱이 조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문화 전통들 사이에서 외관상의 유사성만을 발견할 수 있을 뿐 별다른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행객이 배낭을 메고 여러 사회를 돌아다니는 것과 같이, 다른 신화나 상징들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고 해서 종교가 가지는 일반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프로이드, 마르크스, 그리고 뒤르껭과 같이, 하나의 전통이 다른 모든 전통을 대표한다고 하는 이론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이반스-프리차드와 기어츠에 따르면, 신화와 상징이 사회와 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학자들의 관심사와 마찬가지로 종교학자들의 관심사도 개별적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