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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심삼일作心三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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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한진수 2004년 01월 263호
한진수

갑신년 새해를 맞이하였다. 불가에서야 인위적인 연도의 구분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으랴마는 세속의 중생들이야 새해를 맞으면 새로운 희망과 막연한 두려움으로 설레지 않을 수 없다. 나이를 먹으면서 새해를 맞는 느낌이 조금씩 달라진다. 과거에는 새해를 맞으면서 희망과 기대가 컸었는데, 이제는 새해를 맞는 것이 조금씩 두려워진다. 한 해를 보내는 망년회도 별 재미가 없고 새해를 맞는 신년회도 시큰둥해진다. 급변하는 사회,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삭막해지는 세상에서 한 해를 살아나가는 것이 점차 부담스러워지고 자신감이 없어져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나만이 하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삶에 찌든 우리 소시민들의 대다수가 나와 같은 심정일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무겁다.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 모두가 희망에 부풀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해본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이 있다. 마음먹은 것을 사흘밖에 지키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빗댄 부정적인 말이다. 의지가 약한 나는 작심삼일형 인간의 전형이다. 어릴 때는 ‘공부 열심히 해야지,’ 나이 들어서는 ‘술과 담배를 끊어야지’ 수도 없이 다짐을 하면서도 매번 작심삼일에 그치고 만다. 그런데 요즘은 작심삼일은 커녕 아예 작심 자체를 하지 않는 내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이제야 작심삼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 말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작심한 것을 사흘만이라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이며, 바쁜 세상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제대로 살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작심삼일에 그칠지라도 실망하거나 자책하지 말고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듭거듭 작심삼일을 하다보면 어느새 나의 삶이 변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스님과의 얘기다. 스님들은 대개 보름 단위로 삭발을 하는데, 그게 귀찮을 것 같아 머리가 안 나게 하는 비법이 있다고 하는데 그걸 바르면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스님의 대답은 전혀 의외였다.
다소 번거롭기는 하지만 머리를 깎으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스님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마음을 가다듬게 되기 때문에 삭발이 꼭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렇다. 사회가 어렵고 힘들수록 원망을 하거나 남을 탓하기보다는 삭발하는 심정으로 내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작심삼일이 된다 할지라도.
지난 한 해는 큰스님들이 유난히 많이 돌아가셨다. 3월달에 서암 큰스님이 돌아가시더니 11월 이후 두 달 사이에 청화, 정대, 덕암, 월하, 서옹 큰스님이 잇달아 열반에 드신 것이다. 큰스님들을 보내드린 슬픔에 황망해 하면서도 우리 사회가 어렵고 힘들 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우리를 사랑하고 아끼셨던 큰스님들께서 우리에게 슬픔을 주고자 그렇게 무심하게 떠나신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새해를 앞두고 큰스님들의 입적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받들어 더욱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경책警策이리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이제 갑신년 새해에는 열반에 드신 큰스님들의 뜻을 받들어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자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연기적 삶을 가르치는 불교에서 그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별개의 개체가 아니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연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결국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불이不二’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된다면 서로 비판하고, 다투며, 욕심부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 서로를 형제자매를 넘어 한 몸으로 보는 ‘불이不二’의 자각만 있다면 정파간,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의 구분하는 마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과 모순점이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다. 불이의 가르침이 있기에 나는 불교가 이 세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너무나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오늘날 많은 이들이 불교를 현대문명의 새로운 대안으로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형제자매로서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가르친다. 형제자매이기에 도울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지 않던가. 하물며 형제자매를 넘어 우리 서로가 연기적인 존재로서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에서야 어찌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지 않을 수 있으랴.
내가 나를 돕는 데, 어찌 돕는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가르침, 내 스스로를 돕는다는 마음으로 남을 돕는 것이 진정한 자비慈悲라는 가르침은 실로 ‘불이사상’의 정수이다.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사랑과 미움, 삶과 죽음, 앎과 모름, 부처와 중생의 모든 구분이 다 너와 나를 구별하는 분별심에서 생기는 것이리라.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가르침은 얼마나 심오하고 멋진가. 그래서 나는 사찰의 가람배치 중 불이문을 통과할 때 기분이 가장 좋다. 그리고 불이문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사찰에서는 왠지 서운하고 허전한 느낌이 든다. 여담이지만 나는 술도 둘 이상을 섞어먹는 폭탄주, 즉 불이주를 좋아한다. 폭탄주에는 ‘불이’에 더하여 차별없이 돌아가는 ‘무차,’ 한꺼번에 취기가 오르는 ‘돈오,’ 폭탄이라는 이름 그대로 나의 모든 아상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폭발’ 내지는 ‘해탈’ 등의 불교적 의미를 담고 있기에 좋아하는 것이다.
지난해 석탄일을 며칠 앞두고 부산의 유명한 사찰에 들렀을 때 “우리 모두 부처님같이”라고 쓰여 있는 현수막을 보았다.
첫눈에 너무나 가슴에 와닿는 인상적인 문구였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문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철저하지 못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 부처님답게”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같이’라는 표현은 부처님과 중생의 구분을 전제로 하고 있으나 ‘답게’라는 표현은 내 자신과 부처님을 동일시하고 있어 불이의 가르침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올 석탄일에는 ‘우리 모두 부처님답게’라고 쓴 현수막을 많이 보게 되었으면 한다.
《법화경》에 석가모니께서는 ‘지금 네 모습 그대로가 모두 다 부처’라고 가르쳤건만 우리들은 감히 내가 부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내 안에 불성이 있는데 큰스님들과 같이 대단한 수행을 하여야만 부처가 된다고 생각하며 나와 불성을 다른 것으로 떼어놓고 있는 것이다.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고 하면서 그러면 마당에서 흐드러지게 자고 있는 개(犬)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는 즉 ‘개유불성(犬有佛性)’의 물음에 ‘없다’라고 답한 무無자 화두가 바로 나와 불성을 별개로 생각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가장 잘 지적해준다고 생각된다.
개성(犬性) 자체가 불성인데 그와 구별되는 불성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무無라고 하셨을 것이다.
기와를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되지 않듯이, 우리 중생이 원래 본자리 부처가 아니라면 어찌 수행으로 전혀 다른 존재인 부처가 될 수 있을까. 기와가 갈아져서 거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거울이 묵은 때를 벗겨낼 때에 티 없이 맑은 거울이 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을 돼지처럼 보인다고 하는 태조 이성계를 부처님같이 보인다고 한 무학 대사는 부처가 아닌 태조를 부처처럼 보아준 것이 아니라, 부처인 태조를 그대로 직시한 것이리라.
개인적으로 종교생활을 하자면 조금은 뻔뻔스러운 면이 필요하다고 본다.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뵙고, 나 같이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벅찬 중생이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느냐며 겸손해 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예수 믿으면 하나님 자녀로서 떵떵거리며 자신만만하게 생활하고, 석가모니께서 ‘네가 곧 부처니라’고 가르치면 다소 어색하고 멋쩍긴 해도 ‘그래! 나는 부처야’ 하면서 부처로서 행세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출가하여 수행하는 스님들은 조만간 깨달아 부처가 되겠지만 세속에 있는 중생들은 부처 되기 글렀다고 생각하면서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될 것이다. 원래 부처인 내가 부처임을 자각하는 것이 깨달음이요, 그 깨달음으로 부처답게 살고자 하는 것이 수행일 것이기에 스님들과 같은 힘든 수행은 하지 못하더라도 범부인 나도 부처라는 자각과 자부심만은 늘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모두 ‘내가 곧 부처다’라고 큰소리 한 번 외치며, 부처답게 제대로 살리라고 작심을 했으면 한다.
모두가 부처로 자처하며 다른 사람을 부처로 인정하며 서로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이 땅이 부처님들이 사는 불국정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얘기한 스님이 보름 단위로 삭발할 때 새로운 다짐을 하듯 우리 중생들은 한 달에 한 번 이발할 때만이라도 부처임을 자각하며 부처답게 살자고 다짐을 한다면 우리 사회는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가득한 희망찬 한 해를 보내게 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작심삼일에 그치고 말지라도 거듭거듭 새로운 다짐을 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