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해도 우리가 기억하기조차 싫어하는 슬프고 무섭고 놀랍고 황당한 사건과 일들이 우리의 마음과 정서를 삭막하고 황폐하게 하였습니다. 더불어 함께 살면서 공존과 공생을 위한 이해와 화합의 하모니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서로의 이익만을 도모하고 권익을 지키려는 극한의 대립이나 궁색한 변명, 또는 무관심 속에 우리들의 일상은 희망도 꿈도 의욕도 없는 메마르고 황량한 나날들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썰렁한 분위기에서 제대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정리하며 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설레는 꿈과 희망의 등잔에 불을 밝히지도 못한 채 무기력하게 단지 시간의 굴레에 끌려 새해의 달력을 내걸어두기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듭니다.
《아함경》에 부처님께서 파세나디왕과 나누신 대화 속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가령 사방에서 바위산이 무너지고 모든 생명을 유린하는 절망적인 극한의 상황이 됐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느냐는 질문에, ‘그런 상황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바르게 정의를 행하고 법과 계율, 복과 착함과 사랑을 닦고, 부처님 법의 가르침에 알뜰한 마음으로 귀의하는 길이 있을 뿐’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야 사방을 둘러봐도 캄캄한 암흑일 뿐입니다. 임시방편적인 계책이나 위기만 모면하자는 단순한 생각만 하고 있거나, 남의 탓으로만 책임을 전가하며 불평불만만 터뜨린다면 혼란은 더욱 가중될 뿐이고, 고苦의 순환은 끊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파세나디왕의 대답도,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이라, 체념하듯이 정의를 행하고 법을 따르고 계율을 지키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에 나타난 험악한 현상들이 다른 그 누구나 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나와 우리가 지은 어두운 업의 결과라는 것을 알아차린다면 이제 이 고통의 순환을 단절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자명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지도론》에서는, “유형의 일체 만물이 모두 대지를 의지해서 살듯이, 계戒도 일체 선법善法의 주처이다. 만약 발이 없으면서 걸으려고 한다든가, 날개가 없으면서 날려고 하거나, 배가 없으면서 바다를 건너려고 한다면 될 수가 없듯이, 계를 지키지 않고 좋은 결과를 얻으려 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또 만약 사람이 출가를 하지 않았더라도, 단지 계법을 수행하기만 하면 천상에 태어남을 얻을 것이며, 어떤 사람이 지계가 청정하고 선정과 지혜를 닦으면서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구한다면 이러한 원願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계율은 금지적인 조항이나 형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계율은 하얀 연꽃 같은 불자의 청정한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계율을 지키는 청정한 삶을 브라흐마차리야, 즉 범행梵行이라고도 합니다. 깨어 있고 업이 정화된 자의 맑고 향기로운 삶인 범행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삶에 기쁨과 평정이 있게 되고, 깨달음과 해탈 열반이 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새로이 시작된 이 한 해에 보리심과 효순심, 자비심과 공경심, 그리고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계율을 지키는 밝고·맑고·섬세하고·고요한 삶을 지어간다면 우리에게 두렵거나 놀랍고 험악한 일 없이, 신명나는 맑고 향기로운 세상과 복되고 안락한 삶이 담보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