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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영취산 통도사(중)-금강계단이 마련된 적멸보궁과 자장 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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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5년 04월 158호
자장율사의 창건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 율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유적과 유물은 금강계단밖에 눈에 뜨이지 않는다. 금강계단도 일곱 번이나 고친 탓에 자장스님 당시의 모습은 알 길이 없고 지금 우리가 보는 것들은 대부분 십칠 세기 이 후의 것으로 짐작된다.
통도사를 알려면 먼저 자장 율사의 행적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아야 한다.
자장스님에 대한 기록은 다른 고승들에 견주어 비교적 많은 양이 전하지만 그의 행적을 밝히기 위한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부분들이 안개 속에 가리워진 실정이다. 그래서 어떤 스님은 이러한 자장스님의 신이神異한 행적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우스갯소리를 한다. \'지금도 지장스님은 이천만 여성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좋습디다. \'자장자장\' 하며 자장스님을 애타게 불러 보채는 아이를 재우니 말이요.\"
「삼국유사」나 「속고승전」에는 자장의 생물연대가 한결같이 언급되지 않아 그의 행적을 살피는 데 처음과 끝이 흐릿해지기 일쑤이며, 때에 따라서는 잘못 이해되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의 말년은 권좌에 밀려나 매우 쓸쓸한 최후를 마쳤다느니 중국 도선으로부터 남산 율종을 전수받은 율사라느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하고 백년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장은 진골 귀족으로 선덕여왕의 왕권에 대해 불교적 후원자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낸 분이다. 태어난 해는 알수 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원효나 의상보다는 연상으로 짐작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는 소판 벼슬을 지낸 김무림이 늦게 둔 아들이었고 태어난 때가 석존과 같은 날이어서 이름을 선종랑善宗郞ꡓ이라 하였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심지가 맑고 슬기로웠고 어른이 되어서는 세속적 관례에 따라 결혼하여 사회 생활을 한 정도만 알려져 있다.
그는 어느 때인가 부모를 여의자 논밭을 회사하여 원령사를 짓고 출가한다. 인생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고골관 枯骨觀을 닦는다. 고골관은 흔히 백골관으로도 부르는데 몸에 집착하는 생각을 없애려고 백골만 남은 모습을 보며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자기가 앉은 좁은 방안을 온통 가시덤불로 둘러싸 수행 중에 조금이라도 권태가 와서 졸거나 움직이면 그 가시에 찔리게끔 알몸으로 좌선했다. 또한 목과 대들보에 끈을 달아매어 혼미한 정신을 바로잡는 지독한 고행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구도를 위하여 혼선의 힘을 기울이고 있을 때, 조정에서는 대신의 자리가 비자 관례대로 문벌로 결정해 여러 차례 지장을 불렀으나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왕이 칙령을 내려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하였으나 자장은 \"나는 차라리 단 하루를 살더라도 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를 하고 백 년 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라는 그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자장 결심에 감동하여 다시는 그의 수도를 방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일개 구도승과 왕실의 갈등 대립관계로 파악하기보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본보기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이는 신라 왕실과 사회를 끝까지 외면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구할 수 있는 새로운 힘과 정신적 내실을 지니고서 다시 돌아온 뒤의 행적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출가를 허락받은 자장은 암총岩叢에 은거하였으므로 양식을 도와주는 이가 없었으나 이상하게 생긴 새가 과실을 물어다 바쳐 이를 먹고 지냈다. 그때 홀연히 천인이 와서 오계를 주어 골짜기를 나오니 시골과 도시의 남녀가 다투어 와서 계를 받았다. 그 뒤 자장은 선덕여왕 5년(636)에 칙명을 받아 문인門人 실實 등 십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청량산에 들어갔다. 지장은 이 곳에 머무는 동안 화엄사상의 묘리를 터득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곧 이 곳 문수보살상 앞에 기도하여 꿈에 얻은 게송이 바로 화엄의 내용을 천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 게송과 함께 가사와 사리를 얻어 이미 성인의 수기를 받은 것임을 알고 북내로 내려와 태화지를 지나 서울로 들어간다. 이에 당태종은 칙사를 보내어 위로하고 승광별원에 있게 하는 등 매우 총애하였다. 이 때 자장은 물건을 홈치러 온 도적을 교화하여 계를 주고, 또 눈먼 이를 참회케 하여 뒤에 눈을 뜨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에게 계를 받으려고 모여드는 자가 하루어 기천을 헤아릴 정도였다. 자장은 종남산 운제사의 동쪽 뫼뿌리에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여 집을 짓고 삼 년 동안 살았다.
이 때에도 人神의 계를 받아 영험이 대단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이 가득 찬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리요”

이렇게 지장이 당에서 한창 활동하던 때인 선덕여왕 12년에 신라에서 그의 귀국을 요청하니 태종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를 궁중으로 불러 비단 1령과 잡채 5백 단을 하사하는 등 많은 예물을 주었다. 이 때 흥복사에서는 나라를 위한 대제를 베풀고 대덕들어 모여 여넓 명을 득도하게 하는 등 실로 대대적인 환송연을 베풀었다. 그가 귀국하자 온 나라가 환영하고 분황사에 거주하게 하여 금의와 호위를 극진히 하였다. 궁중으로 청하여 「대승경」을 강설했는데, 칠일 동안 보살계본을 강연할 때는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운무가 강당을 덮었다. 또 최고 승직인 대국통에 임명되어 승니의 규범을 통제하였다. 이에 계를 받아 불교를 받든 이가 백성의 팔, 구 할이 되었고, 승려 되기를 청하는 자가 점점 더 많아져 통도사를 창건하고 계단을 쌓아 사방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을 제도하였다. 또 나라의 복장과 연호 들을 조정에 건의하여 당나라의 것을 취하였고, 사신을 보낼 때마다 서열이 상위에 놓이는 등 외교적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강릉군에 수다사를 창건하여 수도하다가 문수보살의 계시를 따라 태백산 석남원에서 성인의 강림을 기다리던 중 노거사의 행색으로 나타난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하고 비장한 최후를 맞는다.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넣어 가지고 자장을 만나러 온 남루한 노인을 알아보지 못하자 거사는,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이 가득 찬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리요”하고 삼태기를 거꾸로 터니 죽은 강아지가 사자좌로 바뀌고 거기에 올라앉아 방광하며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에 자장은 황급히 의관을 갖추고 남령에 올라 그 빛이 사라진 곳을 향하여 애석해 하다가 그 곳에서 몸을 떨어뜨려 세상을 마쳤다고 한다.

이와같이 석남원에서의 내용이 「속고승전」과 같은「당전」에는 기록되지 않고, 오직 삼국유사에만 보이고 있는 것은 당시 신라사회의 귀족 불교에 대한 국민의 사상적 변화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로 의미가 깊다.

자장은 신라불교 계율 사상의 개척자
자장의 불교사장은 근본적으로는 화엄이 토대이고 그의 실천행은 계율 사상이다. 흔히들 자장을 ꡐ율사’ 라고 부른다. 물론 자장의 행적을 보면 그의 출가는 죽음으로써 항거하여 얻은 결과이고, 이와 같은 항거의 밑바탕에는 지계라는 매우 짙은 종교적 염원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는 지계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구도의 열망으로 해석해야 한다.
아직까지 수계의 사실이 없었으므로 계기에 대한 파괴가 성립되지 않음에 논리상 순리이다. 물론 뒤에 당나라에서나 국내에서도 수계 작법에 따른 신이가 나타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교화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몇몇의 불완전한 사례를 가지고서 율사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사상이 「화엄경」에 뿌리를 두는 오대산 신앙을 모태로 하는, 국토장엄사상과 불국토사상에 근거한 호국사상이기 때문이다.
먼저 그가 입당하여 수학한 사상도 화엄이었고, 또 그가 친견하기를 갈구하였던 문수보살 역시 화엄의 중심 보살이다. 그러므로 자장은 화엄 사상에 의하여 신라의 국토를 장엄하려는 국가관을 지닌 고승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바로 불사리 신앙에서 구체화되었다.
이와 같은 신앙은 곧 화엄의 중심 내용인 오대산 신앙에서 좀더 내실을 추구해 가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지장이 중국 태화지변에서 문수로부터 받았다는 사구게 역시 전적으로 화엄의 교리이다.
그리고 신라의 국토는 전불가람의 유허지이며 황룡사 불전 후면의 이른바 가엽불연좌석이 그 증거의 하나이다.
전불시대부터 인연이 있던 신라는 당연히 수호되어야 한다는 불교적 호국관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이를 좀더 구체화시킨 것은 자장의 청에 의하여 이룩되는 신라 최대의 국찰인 황룡사 구층 목탑의 건립이다. 이 구층탑 건립의 당위성은 곧 그가 중국의 태화지변에서 만난 신인과의 대화에 두고 있지만, 이 대화는 바꾸어 말하면 자장 자신의 종교적 염원인 동시에 그의 대사회적 호국관이다.
곧, 자장이 신인에게 ꡒ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인에 접하고, 또 고구려와 백제가 변경을 차례로 침범하고 이웃 왜구가 종횡하니 이것이 백성들의 환란이 된다” 하고 말하자, 신인이 ꡒ신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나라가 도모하려 하니 빨리 귀국하여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이 와서 조공을 하리라” 고 하였던 것은, 곧 자장의 호국불교 사상의 일단을 천명하는 것이다.

신라호국불교 사상의 도화선은 불사리 신앙
대체로 자장이 살다 간 시기를 진평왕에서부터 선덕여왕, 진덕여왕, 무열왕으로 이어지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중엽까지로 잡을 수 있다 이 시기는 나라 안팎으로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때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내침이 잦아진 7세기에 들어와서 더구나 여자를 국왕으로 하는 신라는 더욱 친당정책을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당나라로 건너간 자장은 대당의 외교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은 앞에서 살펴본 그의 생애에서도 충분히 납득된다. 그러나 신라로서는 사회적 불안이 가실 날이 없었다. 선덕여왕 11년(642)에는 백제 의자왕이 신라의 서쪽 지방 사십여 성을 취하였고, 이어 백제와 고구려가 합세하여 당항성을 쳐 당나라로 이어지는 해로를 차단하는 한편, 또 백제의 공격으로 대야성이 함락되자 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가 죽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다. 품석의 아내는 김춘추의 딸이다.
당시 정사를 쥐고 있던 김춘추를 비롯하여 신라 국민에게는 충격적 비보가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선덕여왕은 자장의 지혜를 구하려고 서둘러 그의 귀국을 요청하였고, 귀국한 자장은 대국통이 되어 신라 왕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그는 왕실 주변을 떠나 개인 수행에 힘쓴 말년에 이르기까지 여도와 국가의 대소사에 깊이 관계하였다고 짐작된다. 황룡사의 구층탑 건립은 그의 업적 가운데 주목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가 가져온 불사리를 황룡사탑과 울산의 태화사탑 그리고 통도사의 계단에 봉안하여 신라 불교에 불사리 신앙이 정착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통도사에 봉안된 불사리와 가사는 그 무렵 불교의 지방 전래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됨과 동시에 오늘날에도 통도사가 불리 신앙의 근본 도량으로서의 불심종가가 되고 있음은 곧 자장의 종교적 이상이 실현된 결과라 하겠다.
이와 함께 자장은 승려의 규범을 세워 학문과 율의律儀를 더욱 돈독히 하여 교단의 기강을 바로잡는 등 불교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이룩하였음은 널리 알려진 바다. 더구나 경상經像을 장엄하게 장식하여 더욱 철저히 관리하도록 했으며, 승니 오부에 각기 구학舊學을 증가함과 동시에 다달이 두 번 설계設戒함으로써 계를 받고 불교를 받드는 사람이 팔, 구 할에 이르렀으니 이 모두가 자장의 역할이었다. 또 자장이 세운 절과 탑이 기록에서 만도 십여 곳이 되고, 오늘날 불사리 신앙에 따른 수많은 절이 모두 자장과 연관되어 있음은 그의 대사회적 영향력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또한 그가 이상으로 삼았던 신라 불국토 신앙은 곧 신라의 호국불교 사상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므로 자장의 업적과 함께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내용이 되고있다.
끝으로 빠뜨릴 수 없는 자장의 업적가운데 하나는 신라 불교 계율 사상의 성립이다. 곧, 자장의 계법이 남산 도선으로부터 유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다. 당시 자장이 종남산을 찾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곳에서 도선과 만난 사실은 어느 기록에서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장은 도선보다 훨씬 연상으로 짐작되며, 더욱 움직일 수 없는 내용은 자장의 행적을 적고 있는 「속고승전」의 선자인 도선이 자장을 극진히 예우하여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전법 사실이나 대면의 내용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도 자장은 도선의 남산율종을 이은 것이 아니라고 장충식 교수는 말한다.
따라서 자장은 천인수계 사실에서 뿐 아니라 신라 계율 사상을 독자적으로 개척하였다는 점에서도 신라 불교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더 큰 업적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사상적으로는 화엄에 근거하여 계율사상을 적용하였으나, 그의 불국토관이나 국가관 역시 불사리 신앙을 밑바탕으로 하여 펼쳐졌다. 따라셔 중국과 신라에서의 교화, 또는 석남원에서의 최후를 장식한 그의 행적에 대하여는 종교인의 이타적 내지 지리적 수행과 귀족 불교에 대한 국민의 사장적 변화를 짐작할 수 있으므로 앞으로 더욱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옛날 승려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금강계단은 통도사의 정신이며 가람배치상으로도 중심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통도사를 언급하는 자료들은 모두 절의 역사를 다루기보다는 금강계단에 관계되는 역사 사건만을 나열하는데 그쳐 통도사의 발자취를 정리하는 데 많은 어려움에 있다. 하지만 통도사는 금강계단의 설치에서부터 절이 시작된다.
「삼국유사」와 내용을 조금 달리하는ꡐ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에는 금강계단이 설치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자장이 당나라 종남산 운제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은 승려로 화하여 가사 한벌과 진신사리 일백 알, 불두골과 손가락뼈, 염주, 경전들을 주면서 말했다.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다. 그대는 말세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이 될 것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취서산-영취산의 옛 이름-기슭에 독룡이 사는 신지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이 그 곳을 옹호하게 되느니라?”
지장은 귀국하여 선덕왕과 함께 취서산을 찾아서 독룡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을 위해 설법한 뒤 못을 메우고 그 위에 계단을 쌓았다.
위의 기록을 통하여 통도사가 창건되기 이전의 그 땅은 매우 큰 연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경내 바닥에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있는데 이것을 열어 보면 일 미터쯤 아래에 물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속전에는 자장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마리였는데, 그 가운데 다섯 마리는 오룡동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으로 갔으나 오직 한 마리만은 굳이 그 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므로 자장은 그 용의 청을 들어 연못 한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그 용을 머물도록 했다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불과 너댓 평의 넓이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들어도 좀처럼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다소 신비스런 이야기가 전한다.

글/이태호, 황호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