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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옛수도 집안 땅을 찾아서-수도의 천연 요새 , 환도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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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숨결과 풍정 - 이호신 1995년 04월 158호
오늘날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로 문명의 간섭을 덜 받은 곳일수록 옛 자취의 흔적은 비례하는 셈이다.
집안 시내의 국내성에서 볼 수 있는 방치와 파괴의 현장에서 이 미터 오십 센티미터쯤 떨어진 환도산성丸都山城은 다행히도 고구려의 흙이 밟히고, 그 날의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국내성이 평지의 성이라면 환도산성은 천연 요새의 지세와 지형을 이용한 산성이다. 유사시에 최후 방어진의 보루로 적군과 대치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일행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 버스가 털털거리며 숨어 차게 몇 구비를 돌아 통구하通構河를 가로지르는 다리에 첫발을 딛었다. 강줄기 너머 평지에는 장엄한 ‘산성하 무덤떼’ 가 즐비하며 키를 넘는 옥수수 밭 사이로 세월의 뒤안 길이 눈에 잡힐 듯 가물거렸다.
환도산성은 백두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노령산맥 지류에 속하며 집안시를 내려다 보는 압록강 오른쪽의 환도산에 있다. 한편 압록강의 통구하 하류 오른편 언덕에 속하며 둥든 모양의 연봉으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육백칠십육 미터이다. 환도산성은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건설한 것으로 처음에는 위나암산성 慰那嚴山城으로 부르다가 환도산성으로 고쳐 불렀다.

팍팍한 길을 따라가자 집들은 드문 편이나 밭으로 개간된 들녘과 골짜기는 녹음 짙은 풍요를 보여 주고, 앞에 펼쳐지는 환도산은 그 형국이 마치 병풍을 두른 듯 위엄이 있다.
마침내 남문 입구 표지석의 ‘환도산성ꡑ이라는 선명한 글귀가 마음을 설레이게 하고 땀을 식혀 주었다. 표석 위로 옹성-네모나게 오그라 들면서 홈을 이루는 축성 형태-의 흔적이 길 양편 언덕 위에 뚜렷이 드러나 보였다.

스케치북을 끼고 먼저 이 옹성에 뛰어올라 오던 길을 살피자 집안 시내로 통하는 마을과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초행길의 나그네도 역시 한눈에 천연요새요, 마지막 수도의 보루로서의 지형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옹성인 남문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성안에서 그 옛날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음마지飮馬池가 보인다. 그런데 가뭄 탓인지 세월의 먼지가 덮인 탓인지 못은 겨우 웅덩이만 하다. 이 곳을 연화지蓮花池, 양어지養魚池라고도 하는데 그 옛날에는 호수에 연꽃도 있고. 잉어도 많아 그리 불렀으며, 대호선왕 11년 가을에 한나라 요동태수가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잉어 작전을 써서 그들을 물리친 이야기가 전해온다.

요동태수가 수개월 동안 환도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여 외부와의 소통을 막았다. 성 안에 물과 양식이 떨어지면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을 믿고 기다린 것이다.
고구려군은 지철대로 지쳤지만 지혜를 발휘하여 양어지의 싱싱한 잉어 수백마리를 연꽃에 싸서 요동태수에게 선물하였다. 그러자 태수는 아직도 환도산성에 먹을 물과 물자가 풍부한 것으로 알고 기다림에 지친 나머지 스스로 퇴각하였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
음마지에서 서쪽으로 수십 미터 전방에는 원추형의 돌을 쌓은 축대가 있는데 이 곳이 바로 산성의 전투를 지휘하던 ‘점장대’ 이다. 점장대에 올라 보면 성의 사방이 보이나 지금으로서는 주저앉았는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점장대 주변에는 병정들이 거처하던 건물터와 궁궐터가 발견되었고, 주변에는 소나무가 무성한데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들놀이를 와서 쉬어 가는 곳이 되었다.

특히 궁궐터의 주춧돌의 발굴은 학술적인 성과를 가져왔고, 지금도 이 곳에서는 고구려의 기왓장이 발견되고 있다.
바람 타는 옛길과 성의 흔적을 더듬으며 길을 내려오다 옥수수밭 사이로 개구리수박과 아이스케키를 파는 마을 사람들과 마주쳤다. 길옆에는 손이 닿는대로 무같이 큰 오이를 얻을 수 있었는데 무더위를 삼키며 잠시 통구강의 교각 밑에서 일행은 발을 담그며 피로를 풀었다.
천 년 전의 물살이, 환도산성의 사연이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과의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