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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스님께 바치는 차 한 잔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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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사 - 여연 2003년 12월 262호
혜암 대종사 진영 -혜암 대종사 열반 2주기를 기리며-

여연 / 대흥사 일지암

불가에서는 업이란 얘기를 참 많이 쓴다. 굳이 불교의 사상이나 이념을 들추지 아니해도 우리들의 세상은 법연 연기의 법칙, 어김없는 이치 속에서 중생의 세계가 중중무진 펼쳐지는 것이니 말이다.
불혹의 나이를 훨씬 지나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반이나 넘었는데 이제야 곰곰 생각해보면 어쩜 그렇게 우리스님의 삶을 그대로 고스란히 닮아 살고 있는지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니 잘못하면 큰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우리 스님의 그 하늘 같은 수행력이나 찬 서릿발 창백한 정진력을 그대로 닮은 삶을 산다면 오직 좋겠는가마는 전혀 다른 이면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아무리 큰 도인이나 큰스님에게도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양면성이기보다는 어떤 일에 있어서 ‘그것이 아닌데’ 하는 허물이라 하기에는 약간 의미가 틀린 그 무엇인가가 있다.
가령 조주종심 스님은 세상의 나이로는 많이 장수한 120살을 넘게 사신 분인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어찌나 수행이 일상의 삶 속에 한 치 어긋남이 없이 살았던지 손톱만큼의 실수가 없었고 도대체가 허물 한 점이 없어 도량에 사는 귀신들이 큰스님의 얼굴(존안)을 한번만이라도 뵈었으면 원도 끝도 없을 것인데 아무리 해도 그 소원이 이루어지지가 않았다.
다시 말해 당신의 화두 삼매, 깨달음의 내안이 바깥 삶 속에 여여한 그야말로 몽중일여의 생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귀신들이 평생의 원인 조주 스님의 못난 얼굴을 우러러 뵙고 깔깔대고 있지 않는가. 조주 스님이 잠깐 사이 화를 내고 말았던 것이다. 다름 아니라 행자들이 채소를 심다가 그만 실거리 몇 잎을 산곡의 개울물에 떠내려가게 했는데 그만 그것을 들키고 말았다. 큰스님께서는 그 잠깐 화내는 사이 당신의 본색을 귀신들께 내보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스님의 얘기를 꺼내려 하는 것은 조주 스님의 얘기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다. 스님을 수년간 모시고 살면서 참 속도 많이 상하게 해 드리고 철딱서니 없는 짓도 많이 했다.
어쩜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스님이 제일 싫어하는 일만 나는 고스란히 그 업을 지었는지 모른다. 그렇게도 야단치고 닦달을 하셨지만 나는 참 어지간히 스님의 말씀을 안 들었다.
전생에 음악을 좋아한 업을 쌓았던지 갓 출가한 나는 그 업을 떨칠 수가 없어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음악을 듣다가 행자 때부터 줄곧 혼나기 일쑤여서 강당 학인 때 그리고 원당암에 모시고 살면서는 그 도가 절정에 이르렀다.
1975년 초 여름이었던가. 지금 사자암에 사는 도각 스님과 함께 큰스님 모시고 고생하던 때이다. 그전 겨울에는 김장채소를 잔뜩 심어 소금에 간해 놓고 고춧가루가 없어 내가 서울로 고춧가루 화주하려 갔다가 이집 저집 드나들면서 말을 못하고 빈손으로 원당암에 돌아오니 이미 간해진 김치는 다 못쓰고 말았던 정말로 그렇게 힘들었던 때인데, 스님께서는 그 해 봄에 지리산 도솔암에서 내려오셔서 우리들이 모시고 산 때이다.
초여름 햇살은 참 달콤하여 낮잠 자기에 감칠맛이 난다. 연초록 나뭇잎들이 살랑대는 바람무늬 속에서 언뜻언뜻 몽환을 여미는 꿈의 자락, 그 수채화 및 여유로움 속에서의 바흐의 플룻이나 클라리넷, 모차르트의 피콜로 음악은 한없는 잠의 줄무늬로 이어지게 한다. 그 잠결 속에서 문득 벼락치는 소리에 혼비백산, 법우 스님과 몇몇 스님들이 하기 싫은 정말로 억지로 스님을 따라 마당의 풀을 메고 있는데 나홀로 잠을 자면서 음악을 듣고 있다니 가만 놔 두겠는가. 몇 번 부르는 소리를 어렴풋이 듣긴 한 것 같은데 비몽사몽 그것이 우리스님 목소리일 줄이야. 어쨌든 호미를 진 우리스님 손은 바르르 떨고 있었고 순간 도망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애써 마련한 전축인데 박살이 나고 스님은 나를 따라오셨다. 아랫길로 줄행랑을 치려다가 노인이니까 산위로 올라가면 더 낫겠지 했는데 그만 그것이 오산이었다. 산위로 오르는 것은 우리스님의 평생 업인데 결국 호미로 내 동방의 목덜미가 걸리고 말았다. 그 뒷일은 상상해 보라.
지금 헤아려보면 그때 우리스님이 지금 내 나이인데 노인으로만 생각했다. 한번은 여름이 가고 초가을 추석이 되는 계절, 큰절 암자절 할 것 없이 여름 장마비에 낡은 문창호지를 바르는 울력이 으레 있었다. 원당암 법당 창호지문, 요사채 문은 어찌해 그리 많은지 정말로 하기 싫은 일 가운데 하나가 문 바르는 일이다. 스님이 꼼꼼하기는 산중에서 다 아는 일, 문 뜯는 것은 일이 아니고 그 먼지 낀 창살 하나하나 일일이 다 닦아 그것도 붓으로 떨고 덜 뜯어낸 조각조각 종이는 왜 그렇게 힘든 것인지. 스님께서 잠시 화장실 가는 사이 바께스로 물을 떠다가 창문에 왕창 부어서 종이는 잘 떼어 냈지만 문창살이 퉁퉁 부어서 그때 귀뺨 맞은 번갯불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쨌든 매사 하는 일마다 스님은 쭈글쭈글한 일만 시키고 우리들은 죽어라 싫어하고 그래서 무슨 놈의 도인이 도 공부하는 수행자가 화도 잘 내시고 맨날 하찮은 일만 시킬까 정말로 내 업은 스님의 반대로만 치달렸다.
보리 밥풀 풀어서 광목 옷 풀하기, 숯불 피워 다리미질하기, 생콩가루 풀어서 밀대죽 끓이기, 화장실 변기 닦기, 액자 하나 거는 데 1시간 걸리기,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지겹고 짜증나는 구질구질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랴. 30년이 지난 오늘, 그 시절 우리스님 나이가 되어 상좌들 신도를 거느리고 절 살림하는 내 업이 꼭 우리스님 닮은 일만 하고 있으니….
결국은 수행이란 일상의 삶, 그대로를 잘 사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고 그것이 모두 우리스님의 일이 내 업이 될 줄이야.
“배가 고파 나물밥 먹고 자순차 마시는 가난한 삶에 즐거움이 넉넉하도다.” 원감 충지의 ‘산에 살다(山居)’라는 시를 읽으며 다시 스님 모시고 살던 때의 그리움을 되뇌이는 오늘 만감이 교차한다.

내생활 맑고 한가하여
두어 말 작설차 있다네
일그러진 화로 놓고
문무화를 피웠네
오지탕관은 오른쪽에 놓고
찻잔은 왼쪽에 두었네
오직 차를 끓여 마시는 삶이
나의 일이니
무엇이 나를 유혹하리

초의 스님의 제자 범해 각안 선사의 다시茶詩를 스님의 맑게 웃으시는 영전에 달여 올려 드리오니 못난 이 소납小衲을 그만 나무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