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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영봉다원 원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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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2003년 12월 262호
사천 영봉다원 원표 스님 걸망을 지고 만행을 하던 수좌 한 사람이 들른 절에는 사람 기척이 없었다. 도량에는 주인 대신 베어진 푸른 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무료하던 그는 호주머니에서 짝지칼을 꺼내어 꼭 차숟가락 길이만큼 대를 잘라내고, 몸통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다수지신茶水之神, 수다지체水茶之體. 매끄러운 목피의 성질을 누르고 글자를 새기어 넣는 일이 재미가 없지 않았으나 글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기는 일을 제대로 한 번 배워 보려고 그는 청사 안광석 선생을, 뒤이어 오옥진 선생을 찾아갔다. 두 분 모두 전각과 서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들이었다. 그 뒤로는 밥도 서각을 위해 먹고, 잠도, 짬을 내어 쉬는 일도 그를 휘어잡은 서각 작업을 위한 것이 되었다.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일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었다. 손대패질, 칼 가는 일은 기본이고, 나무의 성질도 파악해야 했고, 글씨와 구도에 대한 안목도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업을 감당해 내야 할 힘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검도와 합기도, 역기 들기까지 마다지 않으며 체력을 길렀다. 미치지(狂) 않으면 미치지(及) 못할 터였다. 그리고 스무 해가 지난 이즈음에 이르러, 위봉사와 석남사 금당선원, 그리고 연전에 새로 세워진 해인사 홍류문의 현판과 주련 따위에 그의 솜씨가 올려졌다. 우연이 아니라, 숙연이 없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빈 도량에 대나무가 아무리 키를 넘기게 쟁여져 있어도, 보는 이 모두가 차숟가락을 만들고 그 위에 글자를 새기어 보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를 휘어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1951년에 태어나서 20대 초에 청암사로 출가한 그가, 몇 군데 전통 강원을 거쳐 다시금 입학한 중앙승가대 학인 시절에 처음 맛본 차였다. 70년대 중반, 그 무렵이라면 차도 제대로 우려진 것이 아니라, 명命도 색色도 다한 묵은 것을 주전자에 넣고 펄펄 끓여서, 골이 진 엽차 잔에 따라 담은 것이기 쉽다. 이미 차의 전통은 멸절되다시피 한 시절이었고, 절간에서 그렇게나마 소박하게 명을 이어 오던 때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 때 이후로 차는 그에게 일생의 화두요, 선지식이 되어 버렸다. 차 맛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면 인생은 성공이고 말고. 맑고, 담백하고, 은은하게, 나는 그렇게 살끼다!
중앙승가대(2회)을 졸업하면서 “초의 스님과 차”라는 제목으로 졸업 논문을 썼다. 초의가 누구인지 알기나 했으랴. 그러나 그는 불교신문의 묵은 기사더미를 헤치고 자료를 모으다가 초의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에게 차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살게 한 계기가 되어 준 분이었다. 《동다송》, 《다신전》 등의 책으로만 남아 있는 분, 그러나 대흥사에 오래 주석하셨던 초의 스님을 만나는 것이 현실로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바로 그 대흥사에 초의의 종법손으로서 전통 다맥을 잇고 있는 응송 스님이 살고 계셨던 것이다.
독립 운동을 하기도 한 학승이자 대흥사 주지 소임도 오래 보셨던 노장님이 정화 이후 대흥사 밑의 백화사에 머물고 계실 때였다. 이미 아흔을 넘긴 노령임에도 눈도 귀도 밝아 초롱초롱하던 분이었다. 자신을 드러내기 꺼리는 것이 사문의 기본 덕목이라 하더라도, 그 태가 유난하시던 분이었다. 선방 수좌로서 해제만 되면 노장을 찾아서 이론과 실기를 익히었다. 초의 스님이 강조하신 바, 덖음식이 아닌 증제식(찌는 식)을 오롯이 지켜 오고 계신 분. 백여 평씩만큼 땅을 구분지어 놓고, 씨로 심고, 삽목해 심고, 그리고 옮겨와서 심어 두고는, 세 경우가 어찌 다른지 살펴보시던, 실천적 행을 게을리 않던 분이었다.
차철이 되면 대여섯 도반이 함께 무리를 지어 찻잎을 따러 다녔다. 선암사, 보성 대원사, 강진 백련사, 담양 관음사, 나주 불탑사… 남쪽의 사찰 언저리에서 차나무를 찾아내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승속을 막론하고, 우거진 숲 속에서 자라나는 그것들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어서 양도 적고 오죽잖았다. 순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장대키로 자라난 채 시퍼렇게 묵은 잎만 달고 있기 일쑤였던 것이다. 주위에 자라고 있는 비자나무만 귀히 여겨 모두 쳐내고 그루터기만 남은 차나무에서 장하게 솟구쳐오른 것, 그가 따서 만들어 올린 차를 맛보신 노장님은 말했다. 이런 차맛을 누가 있어 알랴! 제대로 된 차도 없고, 있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할 세태를 두고 한 한탄이었다. 스님, 그런데 후맛이 기가 막힙니다. 제자의 말을 들은 노장은 기뻐하셨다. 니가 이제 후맛을 아는구나! 백화사에서 그의 시봉을 들던 제자에게 귀 아프게 새기어 준 가르침은 한 마디로 말하면 “차는 절대로 태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초의 스님은 실학적 정신을 평생의 행으로 실천하신 바, 만 가지 덕을 지닌 차의 한 가지 흠, 채식 위주의 수행승들에 있어 냉기가 승한 차를 벗할 묘리는 “뜨겁게 마신다”는 것이었다. 차를 우리되, 끓은 물을 한김만 내어 붓고, 그리고 식기 전에 마셔야 한다고 했다. 초의의 말씀을 받자옵는 원표 스님은 말했다. 차는 80~90도쯤으로 뜨겁게 마셔야 해요. 딸과(따뤄) 놓은 거, 식기 전에 빨리 드이소.
마실 생각만 해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차, 없어 못 먹지 하루 종일 마셔도 좋을 차, 그러나 날이 좋아서, 마음이 부쩌질 못하니, 비가 오니… 그렇게 핑계를 대지 않고서는 마실 수가 없었다. 철마다 차를 따러 다녀도 늘 ‘양식’이 귀했던 것이다. 양도 양이려니와, 한 뙈기 땅에라도 차씨를 묻고 ‘교과서대로’ 차를 길러 보고 싶었다. 그가 경남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봉명산 중턱에 마지막 남아 살던 사람도 떠나 버린 외진 곳을 찾아든 것은 85년도였다. 절이 있던 곳, 수행자들로 붐비는 은성한 시절이 없지 않았던 영봉사 절터였다. 동국대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져서 확인한 바, 영봉사 절터는 수로왕의 일곱 왕자들이 칠불암으로 옮아가기 전에 수행하던 곳으로서, 허 황후가 아들과 함께 머물렀다는 곳이다. 그이가 바다 건너 이곳으로 시집올 때에 불경과 불상과 차씨를 가져왔다 하니, 수행을 뒷바라지하던 허 황후가 이곳에도 차씨를 심었을 것이 틀림없다고 원표 스님은 생각한다. 내력이 그러한 곳에 그는 혼자서 지게로 흙을 져다가 토굴을 짓고 땅을 고루어 차씨를 묻었다. 차를 좋아하되 방편일 뿐이었다. 그저 제가 먹고, 도반과 함께 나눠 먹자고 시작한 차밭은 이제 산 아래로 자리를 넓혀 내려와 2만 평 차밭으로 몸이 불어났다. 한창 때는 사오십 명 되는 놉을 대서 찻잎을 따야 하는 규모이다. 절 이름을 따서 영봉다원이라는 이름도 달았다.
그가 내는 차가, 승속을 막론하고 맛을 알게 된 이라면 지속적으로 찾게 되는 것에는 까닭이 있다. 그가 스무 해 가까이 벗해 온 차의 본디 맛에 어긋남이 없이 지켜 내는 제다 정신 때문이다. 지난해 나라 안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제주도 태평양 다원 연구팀은 그의 차밭을 찾아와 보고는 모두 크게 놀랐다. 청정한 지역적 조건에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 땅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품을 덜어 줄 제초제나, 생산을 높여 줄 화학 비료 따위로 땅을 죽이고 생명을 욕되게 하는 법이 없다. 종자로 삼은 화개와 다솔사 차씨가 뿌리내리고 있는 차밭은, 계분과 톱밥, 왕겨 등으로 한 해쯤 썩힌 거름을 먹고, 둔덕에서 자라는 잡초까지 덩달아 윤택해지는 곳이다. 영양이 좋은 생물에는 병충해도 덜 입는다.
절기에 맞추어 첫물로 따낸 찻잎은 장작불이 피워진 여섯 개의 가마솥에서 온전히 그의 솜씨로 쪄낸다. 여느 증제식과 다른 점은, 기계가 뿜어 내는 스팀을 써서 익히거나, 끓는 물에 풍덩 담가 데쳐 내는 식이 아니라, 차가 지니고 있는 자체 수분만으로 고루 익혀 내는 수제품手製品이라는 점이다. 달궈진 솥 안에 든 찻잎을 시간 맞춰 재빨리, 그리고 고루 익혀 내는 것은 그가 남에게 맡길 수 없는 그만의 ‘솜씨’이다. 익힌 찻잎은 적당량을 가마솥에 넣고 약한 불로 말리되, 수분을 70~80부쯤이 되게 한다. 90부로 바싹 말려야 좋은 것이나, 그러다가 태우기 십상이라며 응송 스님이 말렸던 바였다. 덜 말릴지언정 태워서는 안 된다! 그것이 스승의 당부였다. 그의 차를 처음 맛본 사람이 ‘덜 고숩다’고 불만을 털어 놓는 것은, 지나치게 태운 찻잎의 탄 맛에 그릇 길들여 있는 입이기 쉽다고 그는 아쉬워한다. 자체 수분만으로 익혀 내는 그의 차는 국내에서 공식으로 판매되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차를 우려 내는 짧은 사이, 방 안에서 가들가들하게 마르고 있는 찻잎을 당겨서 객에게 내민다. 여덟 번 이상 우려 낸 찻잎이라는데 원형이 오롯이 남은 기특한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솜씨가 ‘법제’라 할 만한 것이 아닐는지. 화학 비료를 먹은 일도 없고, 제가 지니고 있던 수분만으로 훼손됨이 없이 제다한 차의 특성이라 했다. 최고급품인 ‘초의선다’는 열 번쯤 우릴 수 있다 했다.
그가 내고 있는 차에는 몇 가지 등급이 있다. 초의의 다맥을 잇는다는 뜻으로 지은 ‘초의선다’가 시중에서 이르는 극상품인 우전차인 셈인데, 그 다음 질인, 응송 스님이 그에게 내린 호를 딴 ‘무음자’ 차까지는 첫물이라 할 만하다. 아니, 그 다음 질인 ‘영봉녹차’까지도 거두는 때는 조금 늦어졌어도 첫물차이다. 한 철에 명실 상부한 우전차를 따 낼 수 있을 때란 일 주일에서 열흘 남짓, 그나마 늦추위가 있거나, 날씨가 불순하면 소출은 줄어든다. 우풍순조해서 잎을 많이 거두어도 소용없다. 그가 손으로 법제해 내는 양은 일정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많아야 100킬로그램이 고작이다. 그리고 5년 동안 발효시켜 내는 ‘자하청다’가 있고, 갈아 낸 찻잎을 보리죽을 섞어 환을 지어서 먹기에 편하게 한 것도 있다. 첫물이 나오기 전, 차를 즐기는 이들은 햇차가 먹고 싶어 애가 단다. 그 입들을 위해 때도 모르고 솟아난 ‘철 없는 이삭들’을 주워 만든 것이 ‘다선일미’, 그의 차를 대먹고 있는 ‘차 식구’들에게 돌리고 남는 것은 시장에 내기도 하지만, 남는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비닐하우스 네 동을 지었다. 나라 안에서 가장 수확이 빠른 화개보다 이른 차를 맛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일은 늘어났다. 그래도 그런 일을 도모해 보는 것이 원표 스님은 재미있다.
선방에 다닐 때 새벽 도량석이 울리면 일어나서 우려 낸 차 한 잔, 아주 묽게 우려 낸 차 한 모금에도, 입을 닫고 있으면 방선 때까지 입 안에 향이 남아 있곤 했다.
다반향초茶半香初, “반 모금 마실 때에 첫 향을 맛본다”고 추사는 읊었으니, 그 말 한 마디로도 추사가 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겠다. 햇차의 싱그러움만을 첫맛으로 삼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침에 처음 맛 본 차맛을 하루 종일 이을 줄 알고, 봄 햇차 맛은 한 해로 이어가게 해야 할 터였다. 그는 말했다. 열 번을 우려 내고 난 뒤에 맹물이 다 된 것이라 해도 내가 마시니 ‘차’라요.
또한 차를 마시되, 차를 간看하고, 저를 반조해야 한다 했다. 그것이 호미를 들고 밭에 엎디어 있어도 ‘일꾼’ 아닌 ‘수행자’가 되는 도리라 했다. 차 일이고 서각 일이고, 동動 중에 정靜이 지어져야 할 터였다. 참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좌복 위에 앉는 일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공부와 일상사가 둘이 되지 않게 하라는 뜻일 터였다. 그것이 옛사람의 뜻이요, 망치와 끌을 들고 나무 비늘을 날리고, 또는 가마솥 위에 엎디어 열기를 견뎌 내는 그가 과녁짓는 바였다.
남녘은 눈부신 가을이었다. 황금빛 은행나무가 다원으로 가는 길을 지키고, 길섶에는 강아지풀이 쇠어 버린 털 사이로 눈부신 햇살을 머금고 있었다. 영봉다원 가는 길, 만장한 가을빛에 눈이 사로잡히어 잔뜩 해찰을 부리다 말고 멈춰 선다. 어느 모롱이를 돌자마자 문득 서늘하게 산 기운이 끼쳐진 것이다. 대숲 그늘 탓만도 아니었다. 차나무 사이로 우유빛 차꽃이 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