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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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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엄변상도 - 김양수 2003년 12월 262호
글·그림 / 김양수 내가 머무는 처소(寂拈山房)에 겨울이 깊었습니다.
숨겨졌던 나뭇가지들이 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을 낱낱이 드러내 놓고도 초연할 수 있는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나를 비춰봅니다.

생의 경이로움으로 시름을 잊었던 봄이 있었습니다.
초록의 숨결 안에서 쉴 수 있었던 여름이 있었습니다.
결실의 충만함으로 마음의 여백을 만났던 가을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따뜻한 가슴으로 살아가야 하는 순백의 겨울이 되었습니다.

티없이 하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증오하고 시기하고 탐내는 마음과
소유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살아온 지난날들 앞에 앉아 보겠습니다.

부드럽고 평온하고 때로는 엄숙한 자연의 품에서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배웠습니다.
새로운 모습으로 오고가는 계절의 신비로움 때문에
설레는 가슴을 안아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진부한 것이 없는 날들 앞에서
침묵할 줄 하는 지혜를 알았습니다.

자연이 안내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날마다 변화하는 마음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지
삶의 모습을 어떻게 갖춰야 하는지
세상의 근본은 무엇인지
부끄러운 모습을 내어놓고 참회를 하겠습니다.
오늘쯤은 그 울림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얀 세상 속에서 걸어 나오는
소리 없는 울림을 들으며 눈을 감으니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