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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에 밝은 혜광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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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장일기 - 효림 1995년 04월 158호
봄비가 내리고 있다. 지난 밤에는 바람이 몹시도 불더니 오늘은 가늘기가 명주실 같은 봄비가 하루종일 내리고 있다. 봄비는 으레 이렇게 가랑비로 오는 모양이다. 그래서 옛 사인도 춘세우春細雨라고 표현했던가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기억조차 아름아름하다. 무장 공비 김신조가 넘어오고 난 뒤였다. 전국은 어디를 가나 검문이 심했고, “이웃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살펴보자” 하는 구호가 동네 입구마다 붙어 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 봄날 나는 혼자 봄비를 맞으며 만행을 하였다. 가평 현동사를 갔는데, 그 곳 스님이 스스로 “ 나는 대처한 스님이요” 하면서 하룻밤 묵어 가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아서 날이 저문 산길을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날은 저물고 버스도 현리까지 밖에 다니지 않았다. 현동사에서 현리까지는 꽤 먼 길이다. 그래서 그 날 저녁은 마을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이집 저집 기웃거리다가 호박죽을 한 그릇 얻어먹고 시골 사랑방을 찾아 들었다. 노인들이 모이는 사랑방이었다.
노인들어 자꾸 말을 시켰지만 하도 피곤해서 그만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누가 옆구리를 발로 차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깨었더니 군인들이 삥 둘러서서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 사랑방에서 나를 수상한 사람이라고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군인들에게 잡혀 간 나는 그날 밤으로 방첩대로 넘겨지고 방첩대에서 일 주일 동안 신원 조회를 받야야 했다. 그 일주일 동안 군인들과 함께 내무반에서 생활하였는데 내내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 곳에서 일 주일을 지내고 아무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보내 주었다. 군인들이 태워다 주는 차를 타고 청평댐까지 나와서 거기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수중에 돈이 한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돈이 참 귀한 시절이었다.
하루 종일 북한강 변을 걸어서 내려 오는데, 강바람은 세차게 불고 가랑비는 오고 해서 길을 걷기가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가랑비도 하루 종일 맞으니 옷이 차츰 젖어서 물어 줄줄 흘렀다.
이렇게 비를 맞으며 나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에 있는 운길산 수종사를 찾아 들어갔다. 이미 한밤중이었다. 대충 비 맞은 옷을 추스리고 객실에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또 일개 중대 병력의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마을 입구에서 수종사로 올라가는 산길을 물었더니 마을 사람들이 또 군부대에 신고를 한 것이다. 나는 다시 군인들에게 이끌려 산을 내려와 방첩대로 연행되었다. 이직 미성년이라 주민등록증이 없기 때문에 다시 그 복잡한 신원 조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현리에 있는 방첩대에서 이미 신원 조회를 받았음을 밝히고 나서야 그 날 밤에 풀려날 수 있었다.
수종사는 나와 이렇듯 각별한 인연과 추억이 서린 곳이다. 수종사의 당시 주지 스님이 바로 혜광스님이시다. 내가 혜광스님을 모시고 산 인연은 이렇게 처음 출발부터 힘들게 시작되었
다.
그 무렵은 교통이 아주 불편한 데에다 그나마 돈이 없어서 웬만한 길은 걸어서 다녔다. 혜광스님은 당시 수종사 주지이면서 총무원 감찰원에 몸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서울 조계사까지 하루 종일 걸어 가서 혜광스님을 처음 친견하고, 수종사에 살아도 좋다는 승낙을 얻을수 있었다. 수종사는 어떤 고생을 감수해서라도 방부를 들이고 살아 보고 싶은 생각이 나는 도량이었다. 전망이 좋기로는 천하 제일의 도량이라고 해야겠다.

혜광스님은 본디 고향이 이북이라고 하셨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쟁중에 이북에서 월남해 오면서 고생한 이야기를 하셨다. 겨울이라서 추위에 떨고 배고픔에 허덕이면서 죽음의 고개를 넘어 왔노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남달리 정이 많고 그리움이 많은 분이다.
본디 출가 전의 속가는 집안이 매우 부유하셨다고 한다. 아버님이 정어리 공장을 경영했다고 하니 상당히 부자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찍이 중국으로 유학 가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
다. 어린 시절 중국에서 학교 다니던 얘기, 친구들과 어울려 여행을 갔다가 탄광촌으로 붙들려 가서 고생했던 이야기 등을 많이 하셨다. 겨울이면 양자강에서 썰매를 타고, 여름방학 때 만주벌판에서 아르바이트로 양을 치던 일을 향수로 간직하고 계셨다. 험난한 시대의 낭만이라고나 해야할까.
스님은 출가가 비교적 늦은 편이다.
전쟁중에 남쪽으로 넘어와 주로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마산 등지에서 살다가 출가를 결심하신 것이다. 출가 본사는 해인사로, 청담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계실 때다. 당시는 정화운동이 일어난 뒤라 전국 사찰들이 대처와 비구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을 때다. 그런 중에 사찰마다 사찰 경제의 밑바탕이 되는 농토가 망실되는 사례가 많았다.
더러는 대처 쪽에서 사찰 토지를 임의로 매각하거나 개인 명의로 이전해 가는 경우도 있었고, 갑자기 비구 측에서 사찰을 정화했지만 소작을 주고 있는 농토가 어디에 있는지를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사정은 농토가 많은 해인사도 예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런 시기에 출가를 한 스님은 이미 행자 시절부터 행정에 밝고 사무를 잘 보는 분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현대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행자 시절에 종무소 일을 보기 시작했다. 그때 스님이 한 일이 해인사의 망실 재산을 찾는 일이었다고 한다. 지금 해인사가 전국 어느 사찰보다도 많은 농토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스님이 농토를 망실하지 않고 찾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암스님과는 그러한 인연으로 오랫동안 모시고 많은 일을 하셨는데 내가 수종사에 있을때도 스님은 총무원장인 영암스님 밑에서 감찰 소임을 맡고 계셨다. 그 해 여름에 나는 스님을 따라 조계사로 나와 몇 달 동안 시자 소임을 보기도했다.
성격이 깔끔하면서도 불칼 같은 분이었다. 평소 인정이 넘치지만 한번 눈밖에 나는 일을 보면 참지 못하고 야단을 치는 것이다.
스님은 일찍부터 스님들도 현대 사회를 잘 인식하고 그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나에게도 조계사에서 시자 소임을 보고 있는 동안 학원에라도 다녀서 여러가지 지식을 습득하라고 했다. 그리고 하루는 통장 하나를 만들어 주면서 용돈이 생기면 함부로 낭비하지 말고 저축을 했다가 공부하는 데 사용하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스님을 오랫동안 모시고 있었으면서도 전혀 그런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 무렵 나의 생각은 출가 수행자는 오로지 참선 수행만이 있을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스님 밑에서 여러 사람이 학비를 지원 받고 동국대학교 등을 다니는 등 공부를 한 것과는 대조적이라고 해야 하겠다.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 되돌아 보니 그 때 스님에게 도움을 받아 학교를 다닌 스님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현대 사회를 아는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내가 남아 가장 앞서가는 현대 사회의 스님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내가 출가하여 가장 먼저 만난 스님 가운데 한 분이 혜광 스님이다. 스님은 선객도 아니고 그렇다고 뛰어난 학승도 아니다. 주로 종단 일을 보는 사판승이었다. 하지만 평소 성격이 엄격하고 정갈한 것과 같이 종단일을 볼 때도 늘 공과 사를 분명하게 하여 공명정대하고 깨끗하게 하셨다. 쉽게 말해서 정화 운동 직후 종단의 삼보 정재가 망실되는 사례가 많은 때에 스님은 오로지 삼보정재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해 오신 것이다. 그 결과가 가장 잘 나타난 곳이 해인사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제 스님은 오래 전에 종단 일을 그만두고 지덕사智德寺라는 작은 절에서 조용히 말년 수행을 하고 계신다. 벌써 세수 칠십을 넘어 팔십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