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광스님은 본디 고향이 이북이라고 하셨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쟁중에 이북에서 월남해 오면서 고생한 이야기를 하셨다. 겨울이라서 추위에 떨고 배고픔에 허덕이면서 죽음의 고개를 넘어 왔노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남달리 정이 많고 그리움이 많은 분이다.
본디 출가 전의 속가는 집안이 매우 부유하셨다고 한다. 아버님이 정어리 공장을 경영했다고 하니 상당히 부자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찍이 중국으로 유학 가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
다. 어린 시절 중국에서 학교 다니던 얘기, 친구들과 어울려 여행을 갔다가 탄광촌으로 붙들려 가서 고생했던 이야기 등을 많이 하셨다. 겨울이면 양자강에서 썰매를 타고, 여름방학 때 만주벌판에서 아르바이트로 양을 치던 일을 향수로 간직하고 계셨다. 험난한 시대의 낭만이라고나 해야할까.
스님은 출가가 비교적 늦은 편이다.
전쟁중에 남쪽으로 넘어와 주로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마산 등지에서 살다가 출가를 결심하신 것이다. 출가 본사는 해인사로, 청담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계실 때다. 당시는 정화운동이 일어난 뒤라 전국 사찰들이 대처와 비구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을 때다. 그런 중에 사찰마다 사찰 경제의 밑바탕이 되는 농토가 망실되는 사례가 많았다.
더러는 대처 쪽에서 사찰 토지를 임의로 매각하거나 개인 명의로 이전해 가는 경우도 있었고, 갑자기 비구 측에서 사찰을 정화했지만 소작을 주고 있는 농토가 어디에 있는지를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사정은 농토가 많은 해인사도 예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런 시기에 출가를 한 스님은 이미 행자 시절부터 행정에 밝고 사무를 잘 보는 분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로서는 드물게 현대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행자 시절에 종무소 일을 보기 시작했다. 그때 스님이 한 일이 해인사의 망실 재산을 찾는 일이었다고 한다. 지금 해인사가 전국 어느 사찰보다도 많은 농토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스님이 농토를 망실하지 않고 찾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암스님과는 그러한 인연으로 오랫동안 모시고 많은 일을 하셨는데 내가 수종사에 있을때도 스님은 총무원장인 영암스님 밑에서 감찰 소임을 맡고 계셨다. 그 해 여름에 나는 스님을 따라 조계사로 나와 몇 달 동안 시자 소임을 보기도했다.
성격이 깔끔하면서도 불칼 같은 분이었다. 평소 인정이 넘치지만 한번 눈밖에 나는 일을 보면 참지 못하고 야단을 치는 것이다.
스님은 일찍부터 스님들도 현대 사회를 잘 인식하고 그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나에게도 조계사에서 시자 소임을 보고 있는 동안 학원에라도 다녀서 여러가지 지식을 습득하라고 했다. 그리고 하루는 통장 하나를 만들어 주면서 용돈이 생기면 함부로 낭비하지 말고 저축을 했다가 공부하는 데 사용하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스님을 오랫동안 모시고 있었으면서도 전혀 그런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 무렵 나의 생각은 출가 수행자는 오로지 참선 수행만이 있을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스님 밑에서 여러 사람이 학비를 지원 받고 동국대학교 등을 다니는 등 공부를 한 것과는 대조적이라고 해야 하겠다.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 되돌아 보니 그 때 스님에게 도움을 받아 학교를 다닌 스님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현대 사회를 아는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내가 남아 가장 앞서가는 현대 사회의 스님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내가 출가하여 가장 먼저 만난 스님 가운데 한 분이 혜광 스님이다. 스님은 선객도 아니고 그렇다고 뛰어난 학승도 아니다. 주로 종단 일을 보는 사판승이었다. 하지만 평소 성격이 엄격하고 정갈한 것과 같이 종단일을 볼 때도 늘 공과 사를 분명하게 하여 공명정대하고 깨끗하게 하셨다. 쉽게 말해서 정화 운동 직후 종단의 삼보 정재가 망실되는 사례가 많은 때에 스님은 오로지 삼보정재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해 오신 것이다. 그 결과가 가장 잘 나타난 곳이 해인사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제 스님은 오래 전에 종단 일을 그만두고 지덕사智德寺라는 작은 절에서 조용히 말년 수행을 하고 계신다. 벌써 세수 칠십을 넘어 팔십을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