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니계를 받고도 강원에 가기 전까지 몇 달 더 행자생활을 하는 사이, 《초발심자경문》을 읽으며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무너져내린 아산 세심사의 탑신을 일으켜 세우는 불사를 하려고 세심사에 두 달간 머물렀던 일타 큰스님이 일러주시는 《초발심자경문》을 배우면서, ‘아, 불교가 이런 거로구나’ 하고 신기해 하고 재미있어 했고, 또 감동을 이기지 못해 밤에 잠도 자지 못했다. 그리고 큰소리로 목이 터져라 읽을 때면 언제나 눈물을 줄줄 흘리곤 했다. 그렇게 불교는 내게 감동으로 다가왔고 온몸으로 전율케 했다.
나의 은사 법련 스님은 일타 스님의 속가 이모님으로 큰스님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으나, 일타 스님이 오실 때면 가사장삼을 수하고 삼배를 올리고 깍듯이 큰스님으로 모셨다. 당시 일타 큰스님은 세수 서른다섯으로 이미 율장을 설하시는 율사스님이셨고, 스무 살이었던 나는 큰스님 앞에선 고개도 들지 못하고 무릎 꿇고 앉아 《초발심자경문》을 배웠다. 큰스님은 《화엄경》과 《원각경》 서문까지 일러주시면서 열강을 하셨으므로 아침공양을 하고 시작한 공부가 끝나면 점심 공양할 때가 되어 있곤 했다. 그러니 절에 일은 많고 탑신불사까지 하고 있어 분주했던 은사스님의 속 타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공부를 하고 있으면 바깥에서 공부하고 있는 줄을 알면서도 ,‘은우야 ’ 부르는 소리가 수시로 들렸고, 때론 ‘저 콩만한 것 앉혀 놓고 무슨 말씀이 저리도 많나.’ 하는 소리도 들리곤 했다.
행자인 나는 공부를 하면서도 좌불안석이었으나 큰스님은 짐짓 모른 채 강講을 하시곤 했는데, 저녁이면 큰스님께서 은사스님에게 “연스님, 왜 그럽니까? 학인이 글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 글을 가르칠 때는 내 상좌니까 연스님은 관계하지 마세요.” 하고 싫은 소리를 하셨다. 그럴 때면 사과를 하곤 했던 은사스님은 다음날 또 앞마당을 가로지르며, 내 이름을 부르곤 했다. 일손이 모자랐던 절살림 탓이기도 했겠으나, 어쩌면 은사스님에게는 상좌의 공부가 호사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비구니가 글을 배우면 중노릇 못한다’ 하여 글을 배우지 못하게 했고, 강원에도 보내지도 않았던 시절에 사셨던 은사스님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일타 큰스님은 《초발심자경문》을 가르치는 동안 나에게 공부를 시키려고 애를 쓰셨다. 하루는 작대기를 깎으시길래 왜 그러나 했더니, 내가 그날 배운 것을 외우느라 방에 앉아 있다가 졸 때면 밖에서 그것으로 머리를 탁탁 치시는 것이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졸고 앉아 있으면, ‘밖으로 나와라’ 하면서 산으로 내쫓았다. 그러면 내가 소나무 사이 돌에 걸터앉아 글을 읽었는데, 혹여 졸고 있으면 어느새 오셨는지 작대기로 어깨를 내리치시며, ‘너희 스님, 지금 바빠서 네가 제일 필요할 때 아니냐? 그런데 내가 내쫓아서 공부시키고 있는데 졸고 있으면 되느냐? 내일 강講 못 바치면 혼날 줄 알아라.” 하셨는데, 어쩌면 그리 졸음이 쏟아지는지, 소나무에 기대앉아 또 졸곤 했다.
일타 큰스님에게서 받은 두 달간의 공부는 아마도 나의 만 두 해 동안의 행자시절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추억이요,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출가의 길이란 무엇이며 수행자는 어떤 길을 가야 한다는 것, 또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큰스님께 배웠던 것이다. 그 뒤 세월이 흘러 스물다섯 해 전쯤, 내가 서른아홉에 처음 이곳 윤필암에 참선공부하러 왔다가, 한 해 뒤 퇴락해 있던 윤필암을 떠나지 못하고 불사하고자 마음먹고 큰스님을 찾아뵈었을 때 스님께서 그러셨다.
“고추장·된장 단지 만지지 말고 정진하며 살라고 공부 조금 시켰더니 불사한다고 돌아다니느냐? 그래도 독살이 주지보다는 대중 외호하고 사는 게 낫다. 힘 닿는 데까지 잘해라.”
그러면서 큰스님께선 “승려 가운데 참선하는 승려가 제일이다. 다음이 포교·기도·대중 외호하며 사는 승려, 그리고 불평만 하고 돌아 다니는 승려이다. 너는 마지막 것만 하지 말고 네 가지 다하며 살아라.” 하시면서 권선문을 써주셨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큰스님 말씀처럼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으나,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아쉬운 게 너무 많다.
해방이 되던 해 내가 세 살 때, 온 가족이 일본에서 나와 인심이 좋다는 충청도에서 살다가, 스무 살 즈음에 절에 들어왔다. 열세 살부터 크지도 않고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내게 이웃집 새댁이 ‘산골에서 내려오는 물을 마시며 절에서 살다 보면 혹시 나을지도 모른다’ 하여, 집에서 가까운 세심사를 찾았는데, 그 ‘혹시’가 ‘역시’가 되었다. 절에 간 첫날, 은사스님의 그 저녁 쇳송 소리를 듣는 순간,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음은 물론, 두어 달쯤 지나자 ‘나도 스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으니, 어렸을 적 서산에 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어딘가 내가 살던 고향으로 가야 하는데…’ 하며 하염없이 울었던, 그 돌아가야 할 고향을 찾은 셈이었다.
몇 달 뒤 머리를 깎아버린 나를 보고 집안식구들이 망연자실, 찾아다니는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행자생활은 몸이 약한 내겐 고된 시집살이였으나, 부처님의 말씀이 너무 좋아 그 시집살이가 달기만 했다. 가랑잎에 불붙듯 성격이 급하신 나의 은사스님은 허약하기만 했던 내 몸이 조금씩 나아지자 일을 시키기 시작했는데, 늦가을이면 산에 올라가 가랑잎을 긁어 지게에 지고 내려오다가 쓰러져서 다 흩어져버린 가랑잎을 다시 주워 모아 부랴부랴 내려와 밥을 짓다보면 진땀이 나기 일쑤였다.
뒷간의 변을 퍼다가 밭에 거름으로 주고 그러면서 행자시절을 보냈으나 그때는 그런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지, 한 번도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수시로 야단을 치며 일을 가르쳤던 은사스님은 내가 일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많으면, ‘그러려면 집으로 가라’ 해놓곤, 혹시 당신의 행자가 집으로 갈까봐, 다음날이면 ‘가라는 소리는 여기 살라는 뜻이야. 내가 가라고 하면 앞문으로 나갔다가 뒷문으로 들어와야 한다’ 하시면서 달래주곤 했다.
그때 ‘어떠한 고생이 있어도 부처님 도량에 있으면서 먹물옷 벗지 마라. 그래야 다음 생에도 부처님 제자 되어 산다’ 하고 간곡히 일렀던 내 은사스님은, 지금 세심사에 머물며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손수 양말이며 옷을 다 빨아입고 사신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수하고 난 물도 그냥 버리는 법 없이 꼭 그 물에 양말이며 걸레를 빠는 것을 잊지 않는다. 얼마나 검약이 몸에 배어 있는 분인지, 내가 행자생활을 끝내고 동학사 강원으로 공부하러 갈 때, ‘동동구루무’ 한 통과 세숫비누, 빨랫비누 한 장씩을 내놓으면서 ‘이것, 강원 끝날 때까지 쓰고 남겨와라’ 하신 분이다. 그래야 되는 줄 알고 나도 그걸 남겨 왔으니, 그 스승에 그 제자였을까.
이곳 윤필암으로 온 뒤부터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 한 이틀 일을 하지 않으면 마치 꿈만 같다. 내 상좌들은 내가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나,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젊은 사람들이 일하러 나가면 마음이 아파 헌옷으로 갈아입고 나서게 되고, 또 일을 하는 것 보고 있다가 ‘이렇게 하면 쉬운데’ 하여 같이 일하다 보니 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죽을 때까지 일을 할 것 같다.
전화를 받지 않은 지 십 년이 넘었을 것이다. 소임 맡은 사람들이 다 알아서 잘 할 것이니, 지나가다 전화기가 아무리 울어대도 받지 않는다. 그런데 한 곳에 너무 오래 있다보니 자꾸 착着이 붙는 것 같아 그게 두렵다. 방 하나 부엌 하나 딸린 조촐한 토굴에서 정진만 하며 살고 싶은 생각이 요즘 들어 부쩍 든다. 행자시절, 《초발심자경문》을 읽으며 감동으로 울었던 그 초발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취재·정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