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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강新疆 쿠차(庫車)의 키질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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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여화 - 김진숙 2003년 11월 261호
혼자 떠나는 여행은 낯선 곳에서 자아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어 좋다. 그리고 뜻이 맞는 도반과 같이하는 여행은 힘든 일은 나누며 즐거움은 갑절로 더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어 또한 좋다. 한편 외국으로 떠나는 여행은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현지인의 안내를 받는 경우가 많다. 중국처럼 넓은 곳은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현지 안내인들과 만나는데 그 만남 또한 소중한 인연이다. 지난 호에서 얘기한 것처럼 쿠차 지역의 모든 석굴은 키질 석굴 연구소 연구원이 안내를 맡고 있다. 우리의 석굴 안내를 맡은 분은 맑고 깊은 눈동자를 가진 젊은 불교미술학자로 석굴의 안내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분의 재량으로 중요한 석굴들을 관람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고 늘 웃으면서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설명이 끝나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과 함께 다음 석굴로의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오랜 시간을 침묵으로 기다려 주었다.

키질 석굴은 쿠차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약 60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 쿠차에서 키질 석굴로 가는 길은 아주 험하고 몇 개의 바위산을 지나야만 했다. 무자트 강을 건너 작은 오아시스가 있고 그 뒤로 키질 석굴이 보였다. 석굴과 강 사이에는 작은 숲이 우거져 숲 사이로 작은 수로들이 여러 개 있어 물이 흐르고 있고 과일 나무도 있었다. 여기에는 키질 석굴 연구소와 근무하는 사람들의 숙소, 식당, 매점, 그리고 관광객이 묵을 수 있는 보리산장菩提山莊이라는 작은 여관이 하나 있다. 이 여관은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것인데, 묵기 위해서는 미리 예약이 필요하다. 만일 이곳에 방이 없으면 쿠차 시내에서 왔다갔다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우리 일행은 늦은 저녁에 도착하였는데도 안내인의 배려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오아시스의 적막에 이끌려 한참을 밖에 서 있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우리는 석굴로 향했다. 키질 석굴은 무자트 강변을 따라 동서 2킬로에 걸쳐 조성되었으며 현재 236굴이 확인되고 있다. 사진과 같이 석굴은 몇 층에 걸쳐서 이루어져 높은 곳은 지면에서 100미터 이상 되는 곳도 있다. 석굴의 조성은 3세기경부터 시작되어 이후 10세기경까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후 이 지역의 다른 석굴들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훼손이 시작되었고 특히 20세기 초 외국의 탐험대가 이곳에 들어와 조사 발굴하면서 상태가 좋았던 많은 벽화들을 대량으로 떼어 그들의 나라로 가져갔다.

한편 연구원의 설명에 의하면 조선족 출신으로 키질 조사에 힘쓴 한낙연韓樂然이라는 분이 계셨다고 했다. 이분은 용정龍井 출신으로 프랑스 유학을 한 화가로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키질 석굴에 와서 조사, 모사模寫, 석굴의 번호 붙이는 작업 등을 하였으나 그 이듬해 키질 석굴에 관련된 자료와 함께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제10굴의 벽면에는 이분이 키질 석굴을 조사했다는 내용을 새겨 놓고 있으며 책으로도 만들어 서점에서 팔고 있었다.

키질 석굴은 내부의 구조에 따라 중심주굴中心柱窟(大像窟을 포함), 방형굴方形窟, 승방굴僧房窟 등으로 나누어진다. 키질 석굴은 높이 10미터가 넘는 상을 조성한 대상굴을 비롯하여 각 굴마다 주실 벽 정면에 본존상이 안치되어 있었고 작은 감실龕室 속에 많은 소조상이 있었으나 대부분 파괴되어 버렸다. 한편 키질 석굴은 벽화로도 유명한데 중심주굴과 방형굴에 주로 그려져 있으며 그 내용에 따라 본생도本生圖, 인연설화도因緣說話圖, 그리고 부처님의 행적에 대해 그린 불전도佛傳圖 등의 세 종류의 나눌 수 있다. 본생도와 인연설화도는 주실主室 천장을 마름모꼴로 나누어서 그 안에 한 내용씩 그리고 있으며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러한 장식적인 마름모꼴의 형식 안에 그림을 그린 것은 다른 지역의 석굴에서는 보이는 않는 쿠차 지역 특유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불전도는 주실 양쪽 벽에 그려져 있어 쉽게 손이 닿는 부분이며 금박 장식이 많았던 관계로 대부분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특히 불상의 얼굴 부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천장의 벽화에는 코발트색과 녹색이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같은 색을 겹치지 않게 배열하여 장식적인 효과도 뛰어났다. 보살과 비천의 모습이나 장식에서는 인도나 그리스의 영향이 농후하였으며 특히 날개 달린 비천의 모습은 아주 이채로웠다.
우리는 전부 25굴을 배관했으나 특히 인상에 남는 곳은 제8굴, 제17굴, 제38굴, 신1굴 등이다.
제8굴은 7세기경의 조성으로 통로 양쪽에 16무사가 검을 가지고 있는 장면이 특징적이다. 제17굴은 3세기경의 조성으로 키질 석굴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여겨지며 보살천정굴菩薩天井窟로도 불린다. 제38굴은 3세기에서 4세기경의 조성으로 낙천굴樂天窟 또는 음악굴音樂窟로도 불린다. 마지막으로 신1굴은 1973년에 발견되었으며 7세기경의 조성으로 보인다. 특히 이 굴의 후실 통로의 낮은 천장에는 4구의 거대한 비천이 완벽하게 남아 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석굴을 보려고 이동시간에는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하루 종일 천장의 벽화들을 보느라고 목이 뻣뻣했지만 벽화 속으로 빨려들 듯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언젠가 나에게 시간이 허락된다면 보리산장에서 머물면서 이 석굴들을 더 많이 보고 조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석굴 입구에 맡겨 놓았던 카메라를 찾아 일행과 함께 몇 장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귀국하여 우리를 안내해 주었던 연구원에게 그의 석굴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떠올리면서 그때 같이 찍은 사진 몇 장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