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인사를 거닐다》에 관한 몇 가지 단상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통령 재신임 문제에, 좀처럼 평온할 줄 모르던 시월도 가고 십일월이 다가옵니다. 해인사에도 가을의 정취가 가득하겠지요. 옹기장이가 해인사와 인연을 맺은 지도 벌써 열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월간해인>의 ‘유마의 방’이라는 칼럼에 매혹되었던 때가 지난 겨울이었으니 어느덧 계절이 세 번 바뀌었군요.
어느 영화배우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탤런트라는 직업은 디자이너도 될 수 있고, 카페주인도 될 수 있고, 교사나 강력계 형사는 물론, 왕이나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모든 직업을 다 체험해 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재미있고 행복한 직업이 또 있겠냐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만드는 직업을 가진 편집자도 그에 못지 않은 행복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만들고 싶은 책을 기획하고, 좋은 글을 엮어 책으로 내기까지란, 마치 곧 태어날 예쁜 아가를 상상하며 길고 긴 고통을 감내하는 산모와 별반 다르지 않지요.
《해인사를 거닐다》라는 책은 처음 이 책의 기획이 잉태되면서부터 많은 분들의 허가를 얻어 한 권의 책이 되어 세상 구경을 하게 될 때까지 더할 나위 없는 많은 아름다운 기억을 제게 허락한 책입니다. 그 아름다운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어찌 영화배우에 비하겠습니까.
원고를 엮어나가면서 일상에서 사소한 것들이 주는 소중함의 가치를 새삼 느끼는 즐거움도 컸습니다만, 가장 큰 감동은 글과 글쓴이의 삶이 둘이 아니라는 걸 직접 느끼는 과정이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을 봉화로 가는 길을 추억할 수 있게 해주신 전우익 님, 대전역 지하도에서 사셨다는 물푸레나무를 직접 보여주셨던 리영희 님,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를 계속하고 계신 황현산 님과 유홍준 님, 그리고 온통 새까만 밤하늘의 별들을 마당에 가득 담고 사시는 이철수 님, 우리 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구나 하는 감동을 주신 사진작가 백종하 님을 뵈면서 사실 깨달은 바가 더 크다고 할까요. 이런 것이 편집자만이 가질 수 있는 커다란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마의 방’에 실린 글들을 책으로 엮어낼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출간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 아니어서 더더욱 검박하고, 솔직하고, 글을 쓰신 분들의 내면이 더 한껏 자연스럽게 풍겨져 나왔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세상의 진리는 거창한 이론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우리네 특별할 것 없는 삶 속에도, 크고 작게 굽이굽이 파도 치는 일상 속에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진리와 깨달음은 켜켜이 쌓여 있노라고 저자들은 목소리를 한데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한 진리들은 소소한 일상조차 애정을 가지고 세심하게 바라보고 돌보는 자들에게만 비로소 열리는 법인 것이지요. 스물두 분의 지성들이 각자의 뒤안길에서 깨달았던 작은 진리들은 그렇게 커다란 숲이 되어 읽는 이로 하여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마음의 산책길이 되었습니다.
온통 힘겨운 삶에 구겨졌던 마음을 햇볕에 활짝 펴 말리듯, 일상을 떠나 그저 세속에 물든 내 마음을 놓아 평온함을 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작은 깨달음을 주는 글 모음,《해인사를 거닐다》 그 풍요로운 글밭 가운데 몇 뙈기를 떼어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마음속으로나마 해인사를 한번 거닐어보는 것은 어떨는지요.
농사를 지어보니 밭 갈아 씨 뿌리는 일 정도가 사람이 하는 일이고, 싹트고 크고 영그는 일은 땅 기운, 햇빛, 비바람의 조화로 이루어집디다. 농산물이란 사람의 노력이 좀 들어간 자연의 산물인데 철없는 인간들이 자신의 피땀만 강조하는 것 같기도 해, 우리의 생명도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닐 성싶습니다. 천지 조화의 힘이 인간의 노력에 비할 수 없이 큰 것 같아요. 삶과 죽음으로 인간은 이루어지는데 우리는 삶만 보고 죽음이란 또 하나의 조화를 소홀히 하는 것 같아요. - 전우익
산에 피는 꽃이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듯이 사실 알고 보면 우리 인간들도 저만치 혼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잡다한 인간사에 얽혀 이리 어울리고 저리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는 듯하지만, 산목련꽃이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단단한 마음을 붙들고 아무도 모르게 산골짜기에서 스스로 꽃피우며 살아가듯이, 우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의 산목련 하나 키우며 혼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이기윤
혹시 이 세상에는 깨달음에 대한 병은 없는 것인지. 내 마음속에서 ‘나는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 깨달음이란 우리 같은 속인에게는 괜한 혼돈의 지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이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세상이 썩어가고, 여러 가지 질병에 인간 스스로가 죽어간다 해도, 마음은 늘 살아 있는 듯합니다. 속세의 깨달음이란 그것 자체가 또 다른 마음을 혼란시키는 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는 모든 것이 고통과 쾌락의 감각적인 시대입니다. 인간에게 감성이 사라진 이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이 생긴 그대로의 본성으로 움직일 때, 고통은 고통대로,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우리의 삶에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생긴 그대로 느낄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즐겁게 밖으로 표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김영동
사랑이 있는 세상을 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보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랑은 그 안에 창조의 원리이자 생명의 원천을 숨겨 담고 있습니다. 하다 못해 길에 밟히는 이름 없는 잡초도 사랑의 힘으로 뿌리를 내리고, 사랑의 힘으로 새순을 내밀어 사랑으로 대지를 덮고 있는 흙과 만나고, 사랑으로 산과 들을 가로지르는 바람과 만나고, 사랑으로 허공을 달려온 햇살과 만나지 못한다면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 윤구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