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정·해인총림 방장 법전 스님묵담 스님의 깊고 청아한 염불소리
출가 다음 날부터 맵디매운 행자생활이 백양사 청류암에서 시작되었다.
묵담 스님은 일상생활에서의 규율을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지킨 호남 제일의 청정 율사였다.
계율을 생명처럼 여겼던 묵담 스님은, ‘무릇 계는 삼세제불이 출현하신 큰 법규요,
사부대중이 성위聖位에 오르게 되는 중요한 문이다’라고 일렀던 율사였다.
또한 근세 한국 스님 중 불교의식에 가장 밝은 선지식으로, 불상·탱화·사리탑 봉행,
사십구재·백일재·우란분재 등의 의식을 그분보다 더 잘한 스님은 없었다.
특히 복장의식과 점안의식에 대해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일가견을 가진 분이어서
의식집전을 많이 했고, 당시 사십대의 나이에도 고승법회에 늘 초청되어 다니곤 했다.
은사스님이 일찍 돌아가시자, 그 당시 대강사였던 금해金海 노스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는데,
내가 청류암에 갔을 땐 금해 노스님이 돌아가신 바로 뒤였다.
묵담 스님은 금해 노스님의 삼년상을 손수 영단에 모시며 예의를 다 갖춰 지내고 있었다.
노스님의 영정에 절을 올리는 엄숙하고 간절한 묵담 스님의 모습은 어린 나의 눈에
무척 감동으로 다가왔고, 그토록 공경을 다하여 스승에게 예를 올리는 모습이 그때 나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누군가를 공경한다는 일이 저토록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침 저녁으로 행자를 포함한 대중 스님들이 나와서 도량석을 했다.
묵담 스님의 염불은 심산유곡에서 들려오는 듯 깊고 은은했고,
높지도 낮지도 않은 청아한 염불소리는 어린 행자의 가슴에 오래 머물곤 했다.
나는 평생 염불이며 어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때 경건하면서도 깊은 염불소리는 사람의 혼을 정화시킬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다
예불하는 법을 배우고 글을 익히는 짬짬이 묵담 스님의 시봉을 들었다.
묵담 스님의 행자들에 대한 교육은 참으로 철저했다. 매사에 철두철미했던 분인지라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어리다고 그냥 봐 넘기는 법이란 없었다.
해동율맥 9대 율사이며, 열한 살에 백양사로 출가하여
선禪과 율律 공부에 밝고 이사理事와 내외內外가 겸전한 당대의 선지식으로
존경을 받고 있던 분이었으나, 어린 행자인 나에겐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묵담 스님이 문을 열고 나와 신을 신는 소리가 들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나갈 만큼
매일, 무섭고 긴장된 나날을 보냈다. 들락날락 늘 일고여덟 명의 행자가 있었으나
석달 이상을 견디는 사람은 없었다. 삼 년을 견딘 건 나 하나뿐이었다.
심지어는 자다가도 뺨을 맞았다. 잠결에 ‘왜 그러시는가’ 하다가,
나중에 공양할 때 대중들에게, ‘저놈이 잠꼬대를 한다’고 말해서 그 이유를 알곤 했다.
불가에 ‘오른쪽으로 누워 자는 것은 여래 잠이요, 왼쪽으로 누워 자는 것은 축생 잠이요,
엎어 자는 것은 마구니 잠이요, 바로 누워 자는 것은 송장 잠이다’라는 말이 전해져 온다.
묵담 스님은 ‘오른쪽으로 누워 자면 잡꿈도 적어지고 정신도 맑아진다’고 하면서
그렇게 자라고 일렀다. 그러나 잠으로 클 나이, 어떻게 숙련된 사람처럼
그렇게 오른쪽으로만 누워 잘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리 뒤척이고 저리 움직이다 보면,
철썩철썩 뺨을 맞게 된 것이다. 나중엔 얼마나 긴장이 되었는지, 한 번도 뒤척이지 못하고 잤다.
아마도 요즘 사람들 같으면 사흘도 못 견디고 도망갔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묵담 스님의 청결한 습관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얼마나 깔끔했는지 ‘찬물도 씻어서 먹고 싶다’고 했고,
뒷간에 다녀와서 뒷물을 하지 않은 채 법당에 들어가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처마 밑의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에 기름기가 보이는 날엔
그 기름기를 걷어내라고 해서 책임자는 물론 다른 행자들까지 불러 먹게 했고,
밥을 너무 많이 하는 날엔 남은 밥을 모두 먹게 했다.
이렇게 행자생활이 고초당초보다 매우니,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행자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듯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집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
엄한 교육을 고스란히 감당했던 나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만큼 나는 우직하고 순진했던 모양이다.
행자들이 왔다가 기겁을 하고 돌아가도 묵담 스님의 매운 행자교육은 바뀌거나 멈춰질 줄 몰랐다.
어느 가을 오후, 설거지를 끝내고 잠시 감나무 밑에 앉아 쉬고 있을 때였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빨갛게 익어가는 감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옆에 있던 돌멩이를 주워 감나무를 향해 던졌다. 툭- 감 한 톨이 떨어졌다.
묵담 스님이 지나가다 마침 이 모습을 보고 나를 불렀다.
“어떤 손으로 돌멩이를 던졌느냐.”
“오른손으로 던졌습니다.”
묵담 스님은 막대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어린 행자의 오른손을 몇 대 때리고 나서야 가던 길을 재촉했다.
종아리도 많이 맞았다. 속가에서 서당에 다닐 때 맞은 매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묵담 스님은 행자 중 누군가 하나 잘못을 하면 모두 불러다 종아리를 때리곤 했다.
한 사람당 스무 개씩 끊어온 막대기 중 가장 실한 것 다섯 개를 골라
그것이 다 부러지도록 종아리를 쳤는데, 행자 중 나이가 가장 어렸던 나는,
먼저 매를 맞은 행자들이 뒷방으로 건너가 울어가면서 약을 바르는 사이, 맨 나중에 맞곤 했다.
어려서부터 살이 여물어 맷집이 좋았던 나는 자신의 차례가 오면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러면 장단지 살이 더 야물어져서 막대기가 톡톡 튀어버리곤 해서 다른 행자들 맞은 매의
삼분의 일쯤만 맞곤 했다. 그러면 묵담 스님은 매채를 놓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놈은, 눈이 작아 겁이 없어.”
내가 그 견디기 어려웠던 행자시절을 지나는 동안
출가자가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 중의 하나인 인내를 배우고 익혔다.
그리고 ‘대충’과 ‘그냥’이라는 낱말은 있을 수 없었던 묵담 스님 밑에서의 행자시절은
훗날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도 철저하게 완벽을 기하게 하는 정신적인 힘을 축적했던
세월이었다. 묵담 스님이 나에게 의도적으로 베풀었던 가르침이요, 은혜였다 할 것이다.
선지禪旨가 싹트다
묵담 스님 밑에서 행자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초발심자경문》을 배웠고,
《석문의범》 《불자필람》 등을 모두 외웠다. 무엇이든 집어넣으면
소화가 되던 어린 시절, 배우는 책들은 줄줄 외웠고 염불소리 또한 점점 힘이 실려 갔다.
행자시절, 나의 마음을 끌어당긴 선지식들이 있었으니,
바로 청류암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운문암 선방의 스님들 모습이었다.
그때 언제나 화두삼매에 들어 있던 인곡 스님이 조실로 주석하고 있으면서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구산 스님 등 스무 명의 수좌스님들을 데리고
여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결제를 나고 있었다.
묵담 스님과 도반이었던 인곡 스님은 옷이 다 떨어지면
가끔 선방에서 내려와 묵담 스님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 나 옷 한 벌 주시게.”
나는 별 말없이 옷을 하나 받아들고 선방으로 올라가는
인곡 스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곤 했다.
가진 거라고는 누더기 가사 한 벌뿐이었던 탈속한 분위기의 인곡 스님을 좋아했던 나는
염불하고 경전을 배우는 것보다는, 자꾸 선방 쪽으로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백양사 큰절에서 식량을 주면 공부하던 것을 멈추고
수좌스님들이 나와서 지게에 식량을 지고 올라가는 모습도 나에겐 예사로이 보이지 않았다.
인정이 깊었던 구산 스님은 일에 묻혀 사는
어린 행자를 불러내어 때때로 당신의 무릎에 재우곤 했다.
묵담 스님이 ‘어디 갔었느냐’고 혼을 내기라도 하면, ‘내가 데리고 있었다’고 하며
감싸주어 꾸지람을 모면하게 했다. 나보다 서너 해 일찍 불가에 입문한 구산 스님은
그뒤, 해인사에서 육이오 전쟁을 함께 치르기도 했고,
후에 여러 번 함께 지낼 것을 구산 스님이 권유했으나,
봉암사에서 스승 성철 노장님을 만난 이후로는 외곬수로 노장님만을 섬기느라 함께 살지는 못했다.
따뜻한 성품에 선지禪旨가 깊었던,
훗날 송광사 방장으로 효봉 선사의 법을 이어갔던 구산 스님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나는 다 떨어진 누더기 가사를 걸쳤으나 고요하고 맑은 분위기의 선방스님들이 좋았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온종일 면벽을 하고 앉아 있는 스님들을 바라보면서
선방에 대한 동경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행자시절은, 참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선지를 싹틔우고 초발심을 키웠던 시절이었다 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이 그리워 남몰래 뿌렸던 눈물과 함께 한 세월이었고,
묵담 노스님의 엄한 교육 속에서 차츰 출가의 법도가 몸에 익어갔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