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해인」편집부에서 주관한 해인가족 모임에 참석하고 나서 두 번 더 해인사를 다녀왔다. 한번은 올해 정월 26일 해인사 입구 홍류동 계곡 농산정에 있는 고운孤雲 최치원의 둔세시 탁본을 뜨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주지스님을 뵙고 필요한 비문 탁본과 보물로 간직한 추사 상량문과 경허스님 방함록 등을 카메라에 담을 뜻을 가지고 있었다.
뒤에 여러 가지 절차를 거쳐 공문도 띄우고 전화로 논의한 끝에 새학기 개학전인 2월 26일에 두 번째로 다녀왔다.
해인사 측의 협조로 필요한 비문은 탁본 하였으나 경허스님 방함록 등을 보지 못해 안타까웠다. 필요한 유물이 소개되어 일반 독자나 후학들에게 그 가치를 보여준다면 문화재로서의 중요한 의미가 오래도록 유전될 것이고 또한 새롭게 인식될 수 있으리라. 때마침 송광사에 있는 역대 국사 영정 등이 도난 당했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해인사 입구에는 홍류동紅流洞과 무릉교가 있으며 폭포와 너럭바위가 수십리 뻗어 있는데 최치원이 이 곳에서 종적을 감추었다고 하는데, 그가 홍류동 계곡의 바위 위에 철언절구를 초서로 새겨 놓은 것이 있다.
고운은 신라 말 대문장가이며 사상과 글씨에도 특출하였다. 특히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해서체는 중국 당대 서가들을 뛰어넘는 명필이다. 여기 새져진 그의 초서 글씨는 또다른 일면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이다.
미친 듯 바위에 부딛치는 물 산봉우리들 외치게 하니,
사람 말소리 지척에서도 듣기 어렵네.
늘 시비하는 말 귀에 닿을까 보아 흐르는 물소리로 산을 다 감싸 놓는가
狂奔疊石吼重變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水盡龍山
해인사에 비장된 추사의 친필 ‘가야산 해인사 중건 상량문 伽椰山海印寺重建上樣文’ 은 국보급이다. 가로 485센티미터, 세로 94센티미터의 감색紺色비단에 3센티미터 크기의 금니金泥로
썼다. 한 행에 스무자씩 예순일곱 행을 쓴 이 거대한 상량문은 그대로 한폭의 화엄 변상도와 같다. 끝에 유왕維王 18년 무인或寅 6월이라고 쓰여 있어 추사가 서른세살이던 순조 18년(1818)에 쓴 것으로 그의 부친 유당 김노경 酉堂 金齊敬이 경상감사로 재임하던 때이다.
김노경이 순조 16년 11월 8일 경상 감사로 부임하는데 해인사는 그 이듬해인 순조 17년에 큰 화재를 만나 대장경판고를 제외한 일천여 칸인 대가람이 일시에 완전 소실된다. 그래서 당시 경상 감사 김노경의 힘을 빌려 다시 중창을 하는데 추사가 권선문 勸善文을 썼다고 한다. 그 공덕 탓인지 상량문을 쓴 그 해에 김노경은 병조참판이 되어 내직으로 승차하고 이듬해 4월 25일에는 추사가 문과에 급제한다.
이 상량문의 글씨는 추사의 삼십대 글씨의 한 전형으로 중후원만重厚圓滿한 필법이 돋보인다. 당나라의 구양순과 안진경의 뼈대에 스승인 청나라 옹방강 필법과 자가의 필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운필은 물론 결구와 간가에 있어서도 한점 흐트러짐 없어 만년의 호방 장쾌하고 변화 무쌍한 필법이 어떤 수련 과정과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본보기이다.
일주문 밖에는 삼층 묘길상탑妙吉祥塔과 반야사지般若寺址 원경왕사탑비(보물 제128호)가 있다. 고려의 인종 3년(1125)에 건립한 비로서 1968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원경왕사 낙진樂眞은 대각국사 의천이 퍽 아낀 인물이다.
이원부李元符가 쓴 비문 글씨는 당나라 우세남 필법인데 그 유려함이 뛰어나다. 탁본을 해 보니 800년이 지났으나 테두리 문양(용 무늬 등)의 섬세함이 감탄스럽다.
이 비는 우리 서예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나, 방치된 관계로 마멸이 심하여 제대로 알아 볼 수가 없어 안타깝다. 해인사로 옮길 때 비각을 세워 보호는 하고 있으나 도로 옆이라 흙먼지에 쌓여 마환이 가속화되고 있어 더욱 마음이 아프다. 중국에는 비림碑林이 몇 군데 있다. 각처에 있는 오래된 비를 일정한 장소에 누각을 지어 옮긴 뒤에 중요한 비는 유리를 끼워 보존하고 있다. 문화재에 대한 우리의 좀더 세심한 배려가 아쉬운 실정이다.
홍제암弘濟魔은 사명 대사를 위해 선조가 지은 암자인데 박정희 대통령이 그 곁에 이전하여
새로 단장했다. 한 옆에 허균이 짓고 당대 명필 한석봉 이 해서 쓴 사명 대사석장비四溟大師石藏碑(광해군 4년, 1612년 건립)가 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승병을 모집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선조 36년(1604)에는 국서를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덕천가강을 만나 강화를 맺고 돌아와 말년에 해인사에 들어가 입적하였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본디의 비는 일제 때 일본인인 합천 경찰서장이 깨뜨려 네 쪽이 나있는 것을 붙여 다시 세워놓았다. 그 곁에는 얼마 전에 복원하여 세운 비가 있는데 복원의 의미를 상실하고 비문을 새로 지어서 쓴 것이 의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