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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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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심을 일구는 이야기 - 이영일 1995년 04월 158호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말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들의 지적 수준은 실로 대단하다.
말은 사람들의 의사를 빠르고 분명하게 전달하며, 모든 존재에 대한 개념과 의식의 제일차적 출발점이 된다.
언어를 구사하기 이전의 인류사회를 한번 짐작해 보면 말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언어가 있기 이전의 그 침묵은 경이롭기보다는 차라리 삭막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서로 마음과 의사를 통할 공통의 언어가 없다 보니 수없는 동작을 주고 받으며 상대방의 뜻과 감정을 확인하려는 어설픈 몸짓뿐이다. 따라서 언어는 인류 최대의 창조품이며 어쩌면 비존재를 존재로 만드는 미술사인지도 모른다.

구약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로 시작하고 있는 것도 말의 기능과 그 힘을 무엇보다 강조한


입을 열기 전의 소식,
그것은 부모의 몸을 빌리기 이전의
소식만큼이나 존재의 이유와 삶의 모습을
깊이있게 열어갈 것이다.



것이라 할 수 있다. 신, 구약의 그 화려한 말들과 빈틈 없는 짜임새는 편저자들이 가졌던 말의 위력에 대한 경외심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짐작케 한다.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온 크리스천들은 본인이 의식하든 않든 대개 말에 대한 훈련을 받고, 그래서인지 대부분 말을 잘하는 것 같다. 이는 결코 그들을 비웃거나 비꼬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부럽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을 잘할 뿐만 아니라 활용 능력도 뛰어나다.
여호와는 하느님이 되기도 했다가 그와 비슷한 하나님이 되기도 한다.
우리 민족 전래의 하느님 (한울님)과는 그 호칭의 내용은 천지 차이이지만 그 차용(?)이 가져온 부수 효과는 세계에 유례없는 선교 성과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이 언어를 심오하게 이끌어 쓴 예는 조금만 관심을 갖고 찾아 보면 부지기수다. 불교는 그 부분에서 아주 게을렀다.

석가도 수많은 말씀을 남겼다. 사십구년 동안 중생들을 위해 들려준 말씀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팔만사천 법문이다.
비유로 설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꾸짖기도 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석가, 그러나 그 많은 말씀을 남기신 석가도 하지 못한 말씀이 너무 많다고 하셨다. 들려준 말이 손에 움켜쥔 나뭇잎 같다면,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는 숲 속의 나뭇잎과 같다고 하셨으니 아쉬움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석가는 또 열반에 드시기 전에는 ‘나는 말한 것이 한마디도 없다’고 했다. 말에 빠져 버릴 제자들의 미래를 염려하신 것일까, 부질없는 너스레를 괜스레 늘어놓았다는 자괴심일까. 무슨 뜻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불교에서는 마음과 말의 관계, 실상과 방편의 관계를 곧잘 달과 손가락에 비유한다.
손은 달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므로 달의 위치를 알고 나서 손가락에 연연해 매달리는 것은
손가락을 달로 오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또 사교입선搖敎入輝이라는 말도 있다. 교를 버리고 선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선종의 우월성이 뚜렷이 비치는 말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것이 교를 무시하는 말로 오해되어 불교의 이론정립과 전도에 역기능으로 작용한 바도 많다. 다시말해 달 있는 곳을 알려면 손가락이 필요하고, 교를 버리려면 버릴 만큼의 교는 가져야 할텐데 애초부터 무시한다면 버리고 들어갈 일이 없는 셈이다.
선은 부처님 마음. 교는 부처님 말씀, 율은 부처님의 행동이란 말씀이 여기서 와 닿는다.
의언진여依言眞如와
이언진여離言眞如라는 말도 있다.
진여를 나타냄에 있어 말에 의지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말을 떠나 나타내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말이란 늘 치우치기 마련이다. 논리의 비약이 있거나 반박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이를 언편이원言偏理圓이라 표현한다.
이치는 원만해도 말이란 치우치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선가에서는 입을 열어도 삼십방, 입을 닫아도 삼십방이라는 말이 생긴 모양이다.
개구즉착 폐구즉실
開口郞錯 閒口郞夫
입을 열면 어긋나고 업을 닫으면 잃어버린다는 얘기다.
이렇게 말을 가지고 말을 하려니까 무슨 말장난을 하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말이란 쓸데없는 말도 많지만 필요할 때도 있기 마련이어서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말이 침묵보다 소중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불교가 정권에 유린당한 역사도 알고 보면 중생의 아픔을 대변하지 않고 몸을 사린 경우가 많았다. 결국 중생구제나 생사일여가 말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필요한 말도 지나칠 때가 많고 침묵보다 못한 말도 너무 많다.
그러다보니 불교에서는 침묵을 더 값지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침묵을 값지게 본다기보다는 마음이나 실천에 훨씬 더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듣기조차 거북한 말, 매끄럽고 번지르르한 겉치레 말, 이간 붙이는 말, 빌붙어 아양떠는 말,
그럴 듯하게 내뱉는 속임수의 말, 남이 하니까 속사정도 모르고 함께 비난하는 말 등,
지금은 정말 말 같지 않은 말, 소음이 너무 많다. 말이야말로 참으로 닦을 일이 많다. 그러나 그 말이란 것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세상을 만드는 것이 말보다는 행동이란 점을 우리가 공감하고 있는 까닭에 말을 닦기 전에 무엇을 닦아야 할 것인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으리라.
입을 열기 전의 소식, 그것은 부모의 몸을 빌리기 이전의 소식만큼이나 존재의 이유와 삶의 모습을 깊이 있게 열어갈 것이다.
밝은 세계, 그것은 매끄러운 말에서가 아니라 바른 마음, 바른 실천에서만 빚어지는 세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