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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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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류동천 - 김홍영 2003년 09월 259호
가야산 홍류동의 빼어난 풍광은 일찍부터 경향 각지의 시인 묵객들에게 널리 알려져 예로부터 심진尋眞 행각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지리적으로 가야산 주변의 성주·고령·합천·거창 등지에서 가야산 유람이 용이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이곳 출신의 학자들이 가야산을 유람하고 유산遊山의 기록과 시들을 많이 남겼는데, 동천東泉 문정유文正儒(1761~1839) 선생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동천은 합천 출신의 학자로서 같은 군의 이면엄李眠·입음立 형제와 함께 가야산을 유람하는 길에 홍류동에 들어갔다가 골짜기 가득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고, 세 사람도 남들이 해놓은 대로 나란히 와석臥石 위에 자신들이 다녀간 자취를 새겼다. 그러나 그 성명을 새기지 않고 팔분체八分體로써 ‘면엄병부眠病夫 입엄농자立聾者 천상산인泉上散人’이라는 12글자를 새겼는데, 이들은 각기 그 성명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호를 따서 그 뒤에 ‘병부’ ‘농자’ ‘산인’ 등을 붙임으로써 겸손하게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자 했다. 그 이유는 종래에 새겨진 많은 이름에 이끼가 끼고 글자가 마멸되어 후일에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능히 누구인지 알 수 없으므로 이름을 돌에 새겨 길이 전하기를 바랐던 제명題名의 의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굳이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기이하게 여겨 조롱하기를, “이름을 적지 않았으니, 누가 후일 이 글이 그대를 말하는지 알겠는가.”라고 했다. 동천은 ‘이름은 실상의 빈객(名者實之賓)’이라는 옛말을 들었는지라 웃으면서 답하기를 “실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름이 있은들 장차 누가 알 것인가. 만약 우리 세 사람이 알려질 만한 실상이 없다면 비록 이름이 있더라도 무엇에 쓰겠는가.” 하고, 면엄 입음과 함께 각기 5언 절구 한 수를 지어 혹자의 조롱에 답했는데, 동천의 시는 이러했다.

수진가야경收盡伽倻景 가야산 경치를 다 거두어
도수복리시都輸腹裏詩 모두 뱃속의 시로 옮겼네
제명류백석題名留白石 이름 적어 백석에 남기고
요대자운지聊待子雲知 다만 자운이 알길 바라네

이 시의 결구에서 말한 자운은 한나라 때의 학자인 양웅揚雄의 자이다. 양웅이 《태현경太玄經》을 지었을 때, 사람들이 비웃자 “후세에 양자운이 있어서 반드시 좋아할 것이다(後世復有揚子雲必好之)”라고 했다. 동천은 스스로 알려질 만한 실상을 쌓기를 다짐하고 역시 양웅처럼 후세의 동천을 기다렸는데, 그가 남긴 유산遊山의 기록과 시를 통하여 비로소 오늘 우리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필자 주:문정유의 시문집인 《동천집》(4권 2책)에는 <가야유기伽倻遊記>와 본문에 소개한 시 외에 홍류동에 놀면서 지은 시 2편이 더 있다. 면엄은 이동벽李東璧(1745~1819)의 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