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붙들고 있는 밤의 끝을 떨치고 일어나면 오전 시간이 여유롭다. 맑은 차 한 잔 마실 여유도 있고, 향 하나 부처님 전에 올리고 고요히 앉는 시간도 넉넉하다. 그러나 그런 줄 알면서도 늘 밤의 끝을 잠이 붙들고 있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늦어서 수면 시간이 그리 넉넉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수면으로부터의 유혹을 쉽게 떨치기 어렵다.
수행자들이 주변 환경으로부터 유혹받는 것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늘 생활 주변에 함께 있어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부터 내 눈과 마음을 다 빼앗는 물건이나 자연까지 많은 것으로부터 유혹받으며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유혹은 모든 여건이 갖추어져야 즐길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절제하기 쉽지만 부지불식간에 함께 하는 유혹들, 특히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유혹의 요인들은 수행생활에 제일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런 유혹으로부터 자기 호흡과 몸도 고르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수행생활을 고르게 할 수 있겠는가. 외부로부터 받는 어떤 충격에 의해서 자기의 크고 작은 욕망을 절제하기보다는 자기 사지와 오장육부, 그리고 육근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적어도 외부로부터 충격은 없을 것이다.
어른스님들께서 수행자는 마음에는 번뇌가 적고 뱃속은 빈 듯해야 공부가 잘 된다고 경계하신다. 시대가 변해도 변함없이 들려주는 충고다. 무엇인가를 채우고 소유해서 얻는 즐거움보다는 마음이나 공간에 여백이 함께 하는 즐거움을 아는 수행자는 충분히 만족한 삶을 사는 수행자일 것이다. 인내와 절제하는 삶에 많은 에너지를 나누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 갈등의 무게가 가벼워 질 것이다.
도심에 살지만 사는 방법과 사고가 좀 고지식한 나는 적어도 수행자에게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한다. 초심에서 배웠듯이 어떤 경계를 대했을 때 열고 닫는 기준 말이다. 물론 세상이 많이 변해서 조선시대를 사는 승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변한다고 해서 정신없이 그것만 좇아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자동차는 배기량이 얼마 이상을 타면 안 된다거나, 스님들이 입는 옷은 종단에서 정한 것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거나, 인연된 소임에 책임과 의무감 없이 꼬리도 없이 사라지는 그런 무책임한 스님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된다거나, 스님들이 출입해도 되는 곳과 출입하지 않아야 할 곳을 가리는 것은 분명해야 한다거나, 이런 등등의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해야 한다. 때론 힘들 때도 있다.
분명 초발심 시절을 다 보냈고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고자 출가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분명한데도 기본적인 수행자의 선이 어디론가 사라진 사람들을 종종 볼 때면 참 씁쓸해진다. 이것도 고집이겠지만 이런 유혹들로부터 참자유를 얻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 스님들은 나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유혹들을 떨치지 못해 생기는 에피소드가 많을 것이다. 세상이 IMF를 맞아 다들 힘들어 할 때였다. 우리 방송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프로가 제작비를 줄이느라 웬만한 음악프로는 작가도 없이 피디와 진행자가 구성을 다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글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늘 방송 원고를 써야 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아마 그날도 다음날 방송 원고를 쓰느라 늦게 잠이 들었을 것이다.
다른 스님들은 예불을 모시기 위해서 일어나는 시간, 새벽 4시에 잠들기 일쑤였으니 잠이라곤 두세 시간 자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니 잠의 유혹을 쉽게 떨칠 수 있었겠는가.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난다는 것이 알람시계가 그렇게 울어대도 일어나지 못하고 아침 6시를 넘기고 있었다. 물론 마음은 일어나서 평소처럼 운동 끝에 세안하고 간단한 아침공양까지 챙겨먹고 방송국을 향했는데 몸은 계속 한밤중이었다. 몸과 마음이 분명 따로 놀고 있었다. 그러니 마음인들 편히 갈 수 있었겠는가.
차를 운전해 가는데 삼청터널 속에서 갇혀버렸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갇혀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으니 생방송에 늦으면 안 된다는 그 마음이 얼마나 조급하고 답답했겠는가. 사방이 차들로 꽉 막혀서 운신을 할 수 없게 되니 점점 몸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방송은 이미 늦었고 그 터널로부터 탈출을 해야만 산다는 그 일념으로 몸을 뒤척이다 잠에서 깨어났다.
정말 9시 생방송을 놓친 줄 알고 너무 놀라 시계를 보니 불과 일어나고자 했던 시간보다 5분 늦은 셈인데 그 5분이 바로 지옥이었다. 터널에서의 탈출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잠으로부터의 탈출을 그렇게 했었다. 일어나 앉아 얼마나 허탈하고 우습던지 부랴부랴 준비하고 방송국으로 향하는 내내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이 직업병이라고 했던가.
어느 광고에서 방송인이 출근길에 차가 밀려 오프닝을 휴대전화로 하던 것이 생각이 나 ‘꿈에서도 휴대전화로 오프닝을 할걸’하는 엉터리 같은 아쉬움도 없진 않았지만 아마 누구든지 이런 유혹은 애교스럽게 봐 줄 수 있지 않을까.
운문사 학인시절에 문화부 소임을 봤던 적이 있었다. <운문>지에 실을 글을 취재하고 학인 원고를 교정보고 편집하는 것이 문화부의 일이다. 학인들이 만드는 계간지라 서툴긴 하지만 정성을 들였던 일이다. 내 기억엔 교정을 5차 이상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도 아마 3차 교정을 보고 대구에 있는 인쇄소에 들렀다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느 번화가를 지나오고 있었다.
유흥업소 앞에서 단정하게 유니폼을 차려입고 빨간 나비넥타이를 맨 젊은이들이 스님들 두세 명이 지나가니까 장난기가 발동을 했던지 깍듯하게 인사를 하면서 일반 사람들이 지나갈 때보다 더 힘찬 목소리로 합창을 하면서 “어서 옵쑈! 어서 옵쑈!” 하는 것이다. 순간 나도 장난기가 발동을 해서 함께 갔던 도반스님의 손을 끌고 “어서 오라잖아요. 들어가 봅시다” 하면서 그 청년들 앞을 지나 태연하게 들어가는 시늉을 하니까 그 젊은이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당황하여 “어~어~어 스님 안 돼요. 들어가시면 안 돼요. 그냥 장난인데 진짜 들어가시면 어떡해요.” 하면서 우리 앞을 가로막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농담이라고 하면서 웃으며 왔지만 스님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마음을 붙드는 것들이 살아가는 주변에 산재해 있다.
요즘은 방 안에서 인터넷에 접속해서 만나는 세계가 또 만만찮다. 공부하는 학인이나 포교 일선에 있는 스님들은 어쩔 수 없이 꼭 있어야 하고 해야 하는 것이지만 필요악인 것만은 분명하다. 필요한 정보만 취하고 꼭 해야 할 일을 위해서 써야 하는 인터넷에 사람들의 불안전한 심리를 자극하는 일부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이트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그로 인한 폐해가 보통일이 아니다.
그렇다. 분명 순간적인 유혹을 떨치지 못하면 이렇게 크고 작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삶을 바꿔 놓은 유혹은 바로 부처님이다. 그 유혹에 그렇게 빠진 것은 내 일생에 제일 큰 행운이지만 모든 유혹이 행운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다시 내 삶의 뿌리를 흔들 만큼 큰 유혹을 받은 적은 없지만 늘 마음 단단하게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코끝을 스치는 차 향기가 나를 유혹한다. 분명 차 향기가 코끝에 머무는 것은 나에게 휴식시간을 허락하라는 뜻일게다. 이런 유혹은 잠시 당하고 싶다. 내일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