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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사 명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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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영옥 1995년 04월 158호
어떤 화두를 누구에게서 타셨느냐고 여쭈었더니 명진스님은 한참을 크게 웃으셨다.
ꡒ육이오 때라 무슨 쌀 배급 타는 것도 아니겠고, 무얼 탑니까. 타기는․․․.ꡓ
수행하는 스님들에겐 들고 있는 화두가 으레 있기 마련이겠으나, 순간순간 부딪쳐 오는 상황들이 모두 화두여야하고, 그 상황들이 모두 다 알 수 없는 가운데, 그런 속에서 끊임없이 제 스스로를 돌이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스님의 웃음은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대답 대신에, 아마도 그에게 끊임없이ꡐ살아 있는ꡑ화두를 던졌던 분으로 짐작되는 한 처사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충청도에서 지금도 농사를 짓고 사는 분인데, 아흔의 나이인데도 정정하다고 했다. ꡒ겉보기로는 ‘별종’ 이고 세상을 순정하게 대하는 법이 없어 언제나 삐딱하다ꡓ고 했다.
그 처사를 만난 것은 명진스님의 나이 서른을 갓 넘길 즈음이었다.
아는 스님이, 출가했다가 속퇴한 ‘만만찮은 선생’ 한 분이 있으니 만나보자고 했다.
듣고 보니 호기심이 동하여 만나 볼 작정을 하고 충청도로 길을 떠났다.
속리산 가는 길에 미원이라는 데가 있는데, 그 날이 장날이라 버스를 타려고 복닥거리는 사람들 틈에 서 있자니 묘하게 생긴 할아버지 한 분이 중 차림인 그에게 슬며시 다가와 시비를 붙였다.
“어디서 오신 스님이신가.ꡓ
ꡒ…사람이란게 어디 온 데가 따로 있나.ꡓ
“아이구, 스님. 나 막걸리 한 잔만 사 주시오.ꡓ
“더운데 막걸리는 무슨… . 냉차나 한 잔 하지.ꡓ
길 옆에 얼음 둥둥 띄운 보리 냉차통을 끼고 앉아 냉차 잔을 받으려는데 처사가 냅다 고함을 질렀다.
“생이냐, 사냐! 한마디 하고 한잔하지!ꡓ
명진스님은 자신의 잔을 들어 바닥에다 패대기를 쳐서 맞받아쳤다. 파싹 깨진 잔을 내려다 보더니 처사는 말했다.
“반눈은 떴구만. 그러나 생이냐 사냐 이르는디 잔 안 깨구두 얘기할 수 있잖여. 왜 앰헌 재산은 낭비하는 거여!ꡓ
첫 만남이 이랬다.
두 사람은 곧 의기가 투합되어 남쪽 지방을 한 바퀴 뺑 돈 뒤에, 명진스님이 그 처사 집에서 한 철을 지내는데, 잠시도 방심을 할 수도 없게 “주시로 당했다ꡓ
한번은 그 처사를 따라다니는 제자와 함께 밥을 먹을 때였다. 밥상은 남자들 따로, 여자들 따로 봐서 먹는데, 쉰이 넘은 제자에게 처사가 한마디 던졌다.
“마조가 와서 그르친 게 많다. 어떻게 그르쳤는지 한마디만 일러 보아라.ꡓ
제자가 밥을 입에 한가득 넣고 우물우물하자 밥 먹던 숟가락으로 밥상을 탁 쳤다.
“니가 내 밑에서 이십 년 동안이나 참선하고 공부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쉬운 것 하나도 대답을 못하는고! 우리 명진스님이 두루 다니며 도를 많이 닦은 분이니 한번 여쭤 보아라!ꡓ
그러자 나이가 쉰이 넘은 제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저보다 스무 해 남짓 아래인 명진스님에게 엎드려 절을 했다.
“스님 한말씀 일러 주십시오.ꡓ
그 난리를 수습하고 난 뒤에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두 사람이 짜고 날 골탕 먹이는 것은 아닌가 싶어졌다.
그러나 그렇게 한번 당하고 나면 명진스님은 한 이틀 잠을 이루지 못하곤 했다. 그것이 처사의 가르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 처사가 명진스님이 있는 절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마침 명진스님이 출타중이라 허행을 할 참인데 장삼 입고 사시마지를 올리러 가시던 노장스님이 처사의 눈에 붙들렸다.
“아이구, 스님. 어디 가십니까.ꡓ
“기도하러 법당 갑니다.ꡓ
“기도는 법당에만 가서 하십니까.ꡓ
“부처가 법당에 계시니 법당 가서 해야지요.ꡓ
“두두물물이 다 불이라 했는데 기도처가 어찌 꼭 법당만이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저랑 진짜 기도 한번 하려 가십시다. 저기 마을에 내려가 저하고 한 잔 하면, 천불만불 어우러져 한바탕 춤추는 소식이 있습니다.ꡓ
신심이 높고 깍듯한 율사이신 노장의 안색이 싹 달라지셨다. 그리고 출타했다 돌아온 명진스님을 붙들어 세웠다.
“선지식이 절에 그리 많은데 그 처사같은 숭악한 놈하고 어울려 지내는고!ꡓ
“선지식이 정해져 있습니까. 두루 선생들입니다.ꡓ
“이 놈아, 그래도 선지식한테 배워야지. 그런 놈하고 다니면 못된 짓만 배워!ꡓ
“선지식 기준은 어디에 둡니까.ꡓ
“인가를 받아야지.ꡓ
“인가는 누가 해 줍니까. 석가는 누구한테 인가를 받았습니까.ꡓ
“부처와 석가를 안 믿는 놈이로구나!ꡓ
“스님, 제가 저를 못 믿는데, 어찌 석가를 믿겠습니까.ꡓ
‘믿는다’ 는 문제가 그러했다.
명진스님에게는 그것만큼 절박하고 절실한 물음이 없었다. 어쩌면 노장에 대한 외람된 언행으로 비칠 만한 이런 일도 “자기 존재에 대한 규명 의지ꡓ에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출가 때의 뜻이 그러했고, 그 뒤로 그가 펼쳐 보인 삶의 행적도 그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존재에 대한 무상성, 끊임없이 바뀌고 있는 실체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삶 속에서 일으키고 확인해 나가려 애쓸 따름이다.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불교운동의 중심에서 선이 굵은 운동가로서 대중의 열렬한 호응과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는 그는 어느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바람을 타고 나타난 기린아ꡓ가 아니었다. 밤하늘의 혜성이 대기권 속에 진입했을 때에 비로소 사람들 눈에 띄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의 ‘바깥 나들이’는 86년도 해인사 승려대회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천 명이 넘는 스님들이 해인사에 운집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출발을 크게 외친 이 대회는 한국 불교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사건’이었다.
이는 산문에서 뿐만이 아니라, 산중 불교, 보수 불교, 호국 불교라는 불교계에 대한 일반의 부정적 이미지를 크게 바꿔 놓은 것으로서, 해방 이후 한국사 오십대 사건의 하나로 꼽힐 만큼 나라 안팎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내 문제 해결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의의를 파악해야 한다ꡓ는 친한 도반의 “꼬드김ꡓ도 있었지만, 그 무렵 운동에 대한 관심은 미미한 편이었다.
출가에 대한 기본 입장이 “본질에 대한 해결ꡓ이었고, 그것이 해결되기 전에 다른 문제를 엮어 나간다는 것은 주제 넘은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회 준비 과정에서 참여하게 되어 진행 과정을 소상히 꿰고 있던 형편이라 “차례만 소개하면 된다ꡓ고 하여 얼떨결에 맡은 소임이 사회였다.
선방에 있었지만 공부가 뜻대로 되지 않아 갈등을 겪고 있던 개인적인 형편과 맞물려 곧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
해인사 승려대회가 있던 때로부터 한 달 뒤에 봉은사에서 열린 10.27 불교법난 규탄대회에 그는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최루탄이 어지러이 날아와 터지는 가운데 서서 “가사 입은 중이 등 보이고 도망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싶어 우물쭈물하고 있다가ꡓ연행되었다.
‘집시법 위반’으로 석달동안 수감되어 있던 성동 구치소에서 그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봉은사 집회 이튿날에 터진 ‘건국대 사건ꡑ에서 검거된 운동권 학생들이 구치소에 대거 들어왔는데, 그들과 교유하면서 리영희 씨의 책을 비롯한 “교과서ꡓ들을 읽게 되었는가 하면그때까지 “폭도들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ꡓ수준 이상으로 알지 못하던 광주시민혁명에 관해서도 소상히 알게 되면서부터 “현실 방기ꡓ에 대한 지독한 자책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처음 보름 동안은 “교화 임무ꡓ를 띠고 잡범들과 함께 지내게 된 바람에 얼마 전 종영된 ‘모래시계’에서와 같은 어깨들과도 함께 지냈지만, 뒤이어 옮겨진 독방은 “체질에 딱 맞는”곳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아침 체조 시간이 따로 있어 원기를 차릴 만했다.
산중과는 또다른 참선 도량이었고, 방해받는 일 없어 공부하기 좋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석 달 동안 백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출감한 뒤로 는 서울의 개운사 주지 노릇도 한 일 년 하게 된다.
주지 소임이 당치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사회에서의 격렬한 집회, 6.29선언, 그리고 연말 대선을 앞 둔 그때 당시 개운사는 “운동의 핵심처”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었던 만큼 “신바람 나게 한번, 일 년쯤만 해 보리라ꡓ마음 먹고 시작한 일이었다. 춤꾼 이애주 씨를 모셔다 민주열사 위령제를 모시는가 하면, 김대중 씨가 해금되고 난 뒤에 첫 연설을 한 것도 그의 주지 소임 시절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당시에 기존 불교 단체에 비해 “불교 대중의 정서가 배려 안 된 사업 내용에 대한 보완, 수정 의미ꡓ를 띠는 대승불교승가회가 그때 창립되고, 그에겐 상임위원장직이 맡겨졌다.
“속가 운동도 다 망쳐 먹은” 결과를 낳았던 대통령 선건 때에 그는 개인적 의사와는 달리 “비판적지지” 대신에 “후보 단일”쪽이라는 명분을 택했다.
그 무렵 이루어졌던 각계 각층의 수많은 속인들과의 교유 가운데에서도 명진스님은 같은 “후보 단일”의 입장에서 있었던 조영래 변호사와의 만남을 특히 잊을 수가 없다. “살아 있었으면 불교 쪽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을ꡓ그의 타계는 그에게 깊은 상실감을 안겨다 주었다.
그때 그는 송광사에서 결재중이었는데, 새벽에 큰 별 하나가 산등성이로 빠른 살처럼 퓨욱하고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성철스님이 돌아가셨나ꡓ싶었는데 그 날 저녁 그의 부음 소식이 날아온 것이다.
떨어지는 별 따위는 그 때까지 거의 본 적이 없었으니, 그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조 변호사는 마지막 인사를 그렇게 보낸 모양이었다.

지난3월 봉은사에서 열린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제2차 총회에서 그는 다른 두 스님과 함께 공동 부의장으로 뽑혔다.
실천불교승가회는 지난해 개혁회의의 실질적인 개혁 주도 세력으로 활약한, 그가 관여했던대승불교승가회가 세 해만에 깃발을 내리고 정토구현승가회 쪽과 손을 맞잡음으로써 “발전적으로 해체 통합된ꡓ단체이다. 그러나 실천불교승가회가 창립될 당시 그는 빠져 버리고 선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현실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항거는ꡒ끝없는 자기 반성과 되돌이켜 봄ꡓ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새삼스러운 생각 때문이었다.
“얼굴 내밀기ꡓ에 마취되어 “뉴스가 될 만한 데는 중구난방으로 왔다갔다 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도 없지 않았다.
훈련을 받은 일도 없고, “소리 지르고, 말도 빠르고, 흥분해서 혼자 떠드는ꡓ식이라고 겸손해 하지만 그는 명연설가로도 이름이 나있다.
사림들 앞에 서서 그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만을 생각해서 할 뿐이지,ꡒ준비를 잘해 간” 연설은 자주 실패하고 만다니, 그는 타고난 연설꾼인 셈이다.
그는 선방에서도 “지대방 한담ꡓ등을 통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니 지난 번의 개혁회의에서 많은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 낸 데 “일정한 역할”을 했을 듯하다. 연설의 장소가 따로 없다는 뜻이다.
출가 전 그는 기독교신자였다고 한다. 부천이 집사로, 모태 신앙이었다.
여섯 살 적부터 교회에 다녔는데 고등학교 때까지 새벽 기도에도 나가는 등 열심이었다. 서울서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3학년 여름 방학 때에 “대학입시 준비차” 무주 구천동의 백련사로 갔다. 어머니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죽음이 잇달았던 무렵이었다.
삶이란 각자가 지은 업의 순환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화ꡑ일 뿐이라는 그 곳 스님의 이야기가 가슴에 닿긴 했지만, 기독교를 쉽게 떨치지는 못했는데 여름 해제 다음날 만행차 그 곳에 들른 어떤 스님 한 분에게 깨졌다.
“불교가 다른 게 아니다. 자기가 스스로를 보기 위해서 애써 나가는 과정을 설명해 놓은 것이다.ꡓ그 소리가 명진스님에게는 천지가 개벽을 하는 것과도 같이 들렸다.
바로 출가를 결심하고 법당의 부처님 앞에 앉으니 그렇게 눈물이 쏟아질 수가 없었다.
“저 분은 깨달음을 얻은 분이다.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아는 분으로서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분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눈물에 났다.
고등학교는 끝마치라는 부친의 말씀대로, 졸업하고도 파월 기간을 포함해서 군대 삼년을 끝낸 뒤에 법주사 탄성스님에게서 계를 받았다.
강원과 율원의 이력을 마치지 않고 곧바로 명산명소의 선방을 찾고. 선지식을 찾아서 생사 문제에 치열하게 매달렸다.
명진스님은 아직도 출가하고 또 출가한다. 그가 걸치고 있는 소임은 그저 출出해야 할 가家일 따름이다. 삶 속에서 부딪치는 상황 상황이 모두 그의 화두이다.
그는ꡒ글하고는 인연이 없어서ꡓ경전은 거의 안 본 편이지만, “한물건어 있으니 시작이 없는 예부터 죽 따라 내려오는데․․․확실하나 이름을 붙일 수도, 상으로 그릴 수도 없더라.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더라ꡑ하는 귀절을 들먹였다. 그리고는 되뇌었다.
한 물건이 어떤 물건인고,
한 물건이 어떤 물건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