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에서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 박물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소개하기 시작한 지도 벌써 10년을 바라보고 있다. 박물관에 종사한다는 것이 그다지 흔한 직업이 아니기에 관심과 호기심을 실은 다양한 질문들이 이어지다 보면 정작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다니는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모른다. 하긴 근무경력이 학교와 박물관이 전부인 내가 사회를 알리 만무하듯이 내가 만났던 사람들 역시 박물관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결국 낯선 이들과의 첫 만남은 마치 박물관 청문회라도 되는 것처럼 박물관을 이해시키는 자리로 변질되고 만다.
솔직히 나와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박물관에 대한 의식이 바르게 변화했을 것이라는 자신은 없다. 하지만 나와의 만남을 통해 적어도 박물관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 아니며, 전시실을 지키는 수위만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늘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사람들이 재미없어 할 소지가 있는 박물관에 관한 질문에 아직까지 싫증내지 않고 열변을 토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내가 박물관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위안 삼을 뿐이다.
박물관에 입사한 이후 박물관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대부분의 만남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의 만남이었지만, 짧은 만남을 통해 나의 박물관 생활에 커다란 지침을 주신 그분과의 만남을 나는 계속해서 되뇌이곤 한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분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박물관에 입사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때로 기억된다. 현재의 신축박물관건물이 완성되기 전이었고, 옛 박물관 전시실은 문을 닫고 개관을 위한 유물정리작업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몹시 무더운 날씨라 땀을 식히기 위해 잠시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누군가가 담장 너머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는지 반갑게 손짓을 했다. 낯선 사람의 방문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대문을 열자 그분은 커다란 배낭을 메고 한 손에 시원한 음료수병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한다는 인사와 함께. 그는 화가이자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나무 밑 벤치로 자리를 옮기고 음료수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갔지만 나는 낯선 사람의 이유 없는 호의에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는 자료를 요구하거나 유물촬영을 부탁하기 위한 접근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언제쯤이나 본색을 드러낼까하고 퉁명스럽게 응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이 자신의 삶을 오늘에 있게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나에게 다가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분이 중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국립중앙박물관 단체관람이 있었다. 별 관심 없이 전시실을 둘러보던 그분은 강희안姜希顔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라는 15세기 그림을 발견하였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배경으로 바위 위에 두 팔을 모아 턱을 괴고 앉아 평화롭게 수면을 바라보고 있는 한 선비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앞에서 그분은 묘한 전율이 자신을 감싸고 있음을 느꼈고, 그 자리에서 자신도 화가가 돼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분은 뜻을 이루어 화가가 되었고 자신의 삶에 항상 감사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준 그분의 이야기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일인가를 새삼 깨우쳐 주었다.
“나의 삶을 바꿔준 그 작품과의 만남을 성사시켜준 많은 분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름 모를 많은 분들이 그 작품을 소중하게 보호해 주셨기 때문에 나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후로 박물관에 종사하는 분들을 항상 존경하고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은 박물관 신출내기였던 나에게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의 지식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교과서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장황하게 서술되어 있던 박물관의 역할은 결국 결연結緣이라는 단어로 정리되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는 인연을 맺어주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 또한 전시를 통해 현대인들과 옛것에 스며 있는 지금은 가고 없는 이들의 정신과의 만남을 성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좀더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게 하기 위해 유물을 보존하고, 보다 친밀한 만남을 맺어주기 위해 연구를 한다.
모든 만남이 그렇듯이 성사되고 난 이후의 관계는 당사자의 몫이다. 인연 자체를 건성으로 흘려보내는 이들도 있을 수 있고, 옛것과의 만남을 통해 정신적 풍요를 느끼는 이들도 있으며, 더 나아가 전에 만났던 그분처럼 인생의 전환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헤아리며 일을 꾸려나가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고 있는 작은 역할들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늘 의식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더구나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고 난 이후에 오는 이들까지도 아우르는 공간이다. 앞으로 박물관에서 맺은 옛것과의 인연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오직 보다 많은 이들이 옛 유물과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을 지속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데 있지 않을까 한다. 그것은 곧 위대한 예술가는 명작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을 영원케 하는 것은 결국 박물관에 종사하는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