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심平常心이 도다이후 조주는 많은 수행자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그의 법문은 늘 간단명료했고 직접적이었다. 누가 무엇을 묻든지 그의 대답은 언제나 ‘차나 한 잔 하고 가게’였다. 그는 이 대답으로 자신의 본래면목을 사량과 분별로는 알 수 없으며, 도가 일상을 떠난 어떤 초월의 지경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어느 수행자가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길은 울타리 밖에 있다.”
그러자 수행자는 다시 물었다.
“울타리 밖의 작은 길을 여쭌 것이 아니라, 대도大道에 대하여 물은 것입니다.”
“대도는 장안으로 나 있다.”
조주는 질문하는 수행자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서울 장안이 깨달음의 세계며 자신의 본래 모습이라면, 수행자의 목적은 이 본래 고향으로 돌아가 참나를 투철히 깨닫는 것이다. 조주는 깨달음으로 가는 특별한 길을 간절히 고대하는 수행자에게 우리가 일상에서 밟고 사는 그 길을 내놓는다. 모든 길이 장안에 이를 수 있듯이 일상의 평범한 모든 순간이 깨달음으로 가는 통로라고 설파한 것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특별함은 없다. 평상심이 바로 도다.
석창포도石菖蒲圖
빠따산런(八大山人)은 30대 초반에 사원을 건립하여 62세까지 그 절의 주지소임을 맡았다. 62세 되는 해에 돌연히 주지의 소임을 내놓고 그곳을 떠나버린다. 이후 그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다.
한 번 절을 떠난 이후 그는 이 절 저 절을 떠돌며 옛 벗을 방문하기도 하고 새로운 도반을 사귀며 여행에 심취한다. 그의 이러한 풍류생활은 그로 하여금 오로지 그림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게 했고, 그 결과 그는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지금까지 세상에 전하는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 가운데 대부분이 모두 이 시기의 것들이다. 이 시기에 몰입한 그림 작업이 그를 최고의 화승畵僧으로 남게 했다.
만년에 이른 빠따산런의 정신세계는 불교뿐만 아니라 타종교의 세계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어느 때는 도사가 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유자儒者가 되기도 하면서 어느 곳에도 걸림 없는 자유의 삶 그 자체를 살았다.
그는 담박澹泊하고 청한淸閑한 생활을 즐겼다. 자연에 묻힌 청빈淸貧과 고행의 생활 속에서 단지 그림으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표현했다. 이러한 삶은 남은 평생 동안 고스란히 지속되었다.
이런 자유로운 삶이 그의 회화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옛사람의 화법을 배웠지만 그것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법으로 스스로 자연의 세계에 드나들었다. 그의 그림 주제는 항상 자연이 대상이었으며 자연 가운데서도 어느 한 순간의 묘사에 진력했다.
단단한 기본과 세련된 기교를 구축한 사람이 그것을 다시 무너뜨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한 번 몸에 밴 기성관념과 문법을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버리기는커녕 도리어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석창포를 그린 이 그림은 어떤 필법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그만의 방법이 드러난다. 거침없이 내달린 붓놀림은 원숙圓熟의 경지를 초월하여 오히려 생경生硬한 감을 풍긴다. 이 점이 바로 빠따산런의 그림이 선화인 이유며 조주의 가르침과 맥이 닿아 있는 이유다. 기교와 화법을 버리고 단순함과 평범함으로 이루는 일상의 회복, 그러면서도 동시에 배어나는 탈속의 경지, 이것이 바로 수행에 있어 평상심의 터득이다.
바위를 그린 왼쪽의 선은 마치 어린아이의 필치를 닮아 치졸稚拙에 가까운 자연스러움과 소박감이 묻어난다. 소름 돋는 대범함이 없고서야 감히 시도할 수 없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이로 인하여 이 그림은 치졸에 가까운 평범함의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다. 여느 누가 이렇게 기교 없는 서툰 선으로 이런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는 치졸미稚拙美와 생경감生硬感을 유치하거나 옹졸하지 않은 격조로 승화시킨 선화의 백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