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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스님 시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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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의 소리 - 현진 1995년 04월 158호
은사스님을 모시고 살게 된 인연으로 요즘 많은 것을 새롭게 배운다. 행자 시절을 빼고는 스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ꡐ가유일로 세유일보家有一老 世有一寶ꡑ라는 말처럼 집안에 어른이 있음은 보물 하나 있는 것과 같다. 어른을 모시고 사는게 아니라사실은 내가 스승의 덕화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 옳다.
스승과 제자는 사사事師의 관계이다. 사事는 스승을 섬기는 일에 게으름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요,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는 데 게으르지 않는 것을 사師라고 한다. 그러므로 제자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는 이가 바로 스승이다. 마조스님은 백장과 남전스님을 통해 자신의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드러냈고, 석두스님은 약산스님과 천황스님을 만남으로써 대지대능大智大能이 드러난 것처럼 출가 사문에게는 스승을 잘 만나는 인연도 커다란 복이다.
은사 스님을 처음 찾았을 때 객방에서 여러 날을 지내고 나서야 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신심과 행동거지를 지켜보았으리라. 법랍 십 년을 채운 지금 스님을 시봉하는 마음과 자세가 예전 같지 않다. 쓸고 닦는 일도 미루기 일쑤고 빨랫감도 내 몫이 아니라고 외면한다. 그새 아만심이 늘고 교만이 부쩍 자란 탓이다. 그러다가 당신이 손수 청소를 하는 날이면 그어떤 꾸지림이나 회초리보다 큰 효과가 나타난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귓볼이 뜨거워지는 게다.
경전에는 시자가 갖추어야 할 여넓 가지 법이 적혀 있으며, 율장은 스승을 모시는 네 가지 마음을 말하고 있다. 신심과 원력도 없이 스님을 공경하지 아니하면 위만죄違慢罪의 허물이 생긴다는 지적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닌 듯하다.
은사 스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거나 스님의 법력에 누가 되는 행동은 이만저만한 위만죄가 아닐 수 없다. 예컨대 건당입실建幢入室을 마음대로 하여 사제간의 인연을 정리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행해行解가 원만하여 다른 이의 사표가 될만 하면 전법사에게 법맥을 이어받는 것을 건당 또는 입실이라고 불렀다. 부처님이 염화시중의 장면을 통해 가섭이 이어받은 것도 이것이고, 달마이래 중국에서 조사들에 의해 전해져 온 것 역시 이러한 법맥이다. 혹 법력이 아닌 권력이나 이권 때문에 건당의 본디 의미를 훼손하고 오용할까 그게 두렵다.
노스님들이 하는 말이 있다. 절 집안에서는 은사를 바꾼 적이 있는 이나 환속하였다가 다시 입산한 이들은 말석 차지도 힘들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 두 가지는 불법을 망치는 마군의 행동이라 하여 좋게 보지 않는다. 은사恩師는 나를 불문에 인도한 은인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선지식이 아니던가 스승의 책임을 묻기에 앞서서 우리 자신이 순수하게 스승을 섬기고 모셨는지부터 따져 보아야하리라. 스승의 은혜는 어떤 식으로든 저울질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게다. 하루하루의 수행이 모자라 시은施恩이 자꾸 쌓이고, 이제는 은사 스님 시봉도 제대로 못하니 위만죄가 참으로 태산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