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하기 전 은사스님을 따라 노스님 생신에 갔다가, 노스님을 뵙고 떠나올 때, “8월에 제가 출가하러 오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노스님께서 “다시 온다 해놓고 온다는 사람, 내가 못 봤다. 중이 되려면 하늘을 덮고 남을 만한 복이 있어야 되는데, 네 복에 어떻게 중이 되겠느냐.” 하시며 비수를 따악 지르시는 거였다. 그때 생각엔 ‘뭐, 하늘을 덮을만한 복까지야’ 했는데, 절집에 들어와 살아보니까, 그 말씀은 진리였다. 서른 해 세월을 살면서 한 번도 그 말씀을 의심해 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행자시절을 끝내고 화운사 강원으로 가서 《초발심자경문》을 배우고 《치문》을 배우면서, 강의를 듣기 위해 2층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서, ‘이렇게 좋은 경전을 배울 수 있는 것이 진짜 하늘을 덮고 남는 복이구나’ 거듭 거듭 감탄했고, 환희심에 휩싸이곤 했다.
얼마 전 신도님들에게 기초교리강좌를 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무 영리했어요. 이 길을 선택했으니 말입니다’ 그랬다. 자다가 일어나 삭발한 머리를 만져보곤 ‘진짜 선택을 잘 했구나’ 흐뭇해 했던 게 얼마나 많았던가 말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무엇인지, 출가의 길이 무엇인지 몰랐어도 그냥 이 길이 좋아보였다.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직장을 다니며 동생들과 함께 있을 때, 대구 보현사 학생회 간부였던 동생이 수련회에 다녀와서는 삼천배를 했다는 얘기며, 참선하느라 잠을 못 잤다느니 하는 얘기를 들으면 왠지 신심이 나곤 했다. 20대 초반부터 출가를 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으나, 선뜻 결정을 못하고 있다가, 노스님께 다녀와서는 동생들을 앉혀놓고 그랬다.
“나는 출가하러 해인사 삼선암으로 간다. 절대 데리러 오지 마라.”
그러면서, “그러나 내가 만약 전화를 하거들랑 데리러 와서, 무조건 차에 싣고 가라.” 하고 단서를 붙였다. 내게 영향을 주었던 동생이 아무 말 없이 출가하려고 절에 들어가서 찾아다니느라고 고생을 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행선지를 분명히 해놓은 것이었고, 혹 도저히 못있겠다는 생각이 들어도 자존심 때문에 절을 떠나오지 못할지 몰라 전화를 하면 이유를 묻지 말고 데려가라고 일러놓았던 것이니, 아마도 나처럼 단도리를 분명히 해놓고 출가한 이도 드물 것이다.
그런데 행자시절 한 해 동안 나를 데리러 온 사람도 없었고, 내가 전화를 한 적도 없었으니까, 괜한 걱정을 했던 셈이다. 단지 고모님이 한 번 오셔서 실컷 우시다가 내려간 적이 있었고, 어머니가 삭발한 딸을 보곤 이미 데리고 가긴 틀렸다 싶었는지, 눈물만 훔치다가, ‘어차피 머리를 깎았으니 잘 살아라’ 하곤 내려간 적이 있었을 뿐이다. 출가에의 인연을 잘 지어놓았던 것 같다. 우선 자신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만, 그래도 주변의 여건이 편치 않으면 공부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삼선암에서의 행자시절은 ‘이런 세상도 있었는가’ 할만큼 행복한 나날이었다. 절집의 모든 게 좋았지만 노스님이 내게 듬뿍 주었던 사랑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이 스물여덟의 늦깎이로 절에 들어오며, 잘 견딜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은 괜한 기우였다. 얼마나 좋았으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절로 오게 해야지’ 생각했겠는가. 별 효험을 보지 못했지만,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내 그릇이 적어 그렇지 그 광대무변하고 시원한 부처님 법이 얼마나 좋던가.
은사이신 태연 스님께서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계셨기 때문에 나의 행자시절은 노스님을 시봉하면서 노스님과 함께 했던 추억이 전부다. 도일 노스님은 속가에서 《소학》, 《대학》 등 글을 익히고 들어오신 유식한 분이었고, 평생을 참선으로 보내신 선객으로 언제나 차분히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대중과 함께 지내면서 부딪치는 사소한 일들로 내가 가끔 투덜거리기라도 하면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타이르곤 했다.
“얘야, 중노릇하려면 오장육부를 빼서 저 대문 밖에 걸어놓아야 한다. 참을 ‘인忍’ 자를 백 번 써서 마음에 써 붙여라. 그러면 살인도 면한다.”
참을 ‘인’자를 가슴에 꼬옥 박아 놓고 살면 그 집에 기르는 닭과 새들까지 화합해서 잘 산다는 고사까지 곁들이면서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결제철엔 사오십 명의 스님들이 계시면서 오롯이 수행정진에만 몰두하는 조용한 분위기였던 삼선암엔 성문노스님과 정행 노스님이 계셨는데, 나의 노스님과 사형사제인 두 분은 자매분으로 자비롭기 그지없으신 분들로, 나의 행자시절에 기억에 남는 노스님들이다.
동진출가한 어린 행자부터 연세 많으신 어른스님들이 함께 모여사는 곳이었으니 조심스러웠던 분위기였으나, 가끔 큰소리로 말하거나 밥을 태우기도 해서 대중공사를 받기도 했다. 두루마기를 차려 입고 어른스님들 앞에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공손히 삼배를 올렸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잘못했을 땐 108배로 참회를 하기도 했다.
그땐 ‘참회할 만큼 큰일도 아닌데’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런 노스님들의 가르침이 밑거름이 되어서 착실하게 중물이 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엔 환경 자체가 바뀌어서 밥 태울 일이 없고, 자기 상좌가 아니면 간섭을 안하는 풍속으로 바뀌어버렸으니, 아쉬운 생각과 함께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비교적 늦은 나이로 출가한 덕에 노스님을 스승 겸 도반으로 의지하고 항상 그분과 함께 했던 행자시절이었다. 그래서 내가 행자시절을 마치고 강원에 가서 공부하고 있을 때, 노스님께서 보내신 편지엔 ‘네 마음 내가 알고 내 마음 네가 알지 않느냐…’ 하시며 운을 떼시곤 했다. 그만큼 노스님께 사랑도 많이 받고 마음을 나누며 보낸 세월이었다. 노스님께선 당시 세수 일흔이 넘으셨으니, 지금 살아 계시면 백살이시다.
노스님께선 ‘대중이 화합하고 사는 데는 인욕이 제일이며, 승려는 참선밖에 할 것이 없다’고 누누이 가르침을 주셨는데, 나는 화합하는데 필요한 ‘인욕’이라는 무기를 가슴에 수없이 새겼으되, 선객으로 살진 못했다. 선방에서 출가를 했고, 선객인 노스님의 가르침과 선방스님들의 단호한 모습을 보면서, ‘공부하고 빨리 선방으로 가야지’ 했는데, 선객으로 살 만한 인연이 안되었던 모양이다. 강원을 마치고 한 철 선방에서 지낸 다음,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은사스님을 따라 이런저런 불사에 매달리다 보니 어느덧 서른 해가 지나버린 것이다. 지금도 선방에의 향수는 짙게 남아 있어서 언젠가 돌아가야지 하고 있으나, 글쎄, 시절인연이 도래할지 모르겠다.
돌아보면 행자시절 착실했던 그 공덕으로 평생을 산다는 생각이 든다. 순수하기만 했던 초발심 시절, 무심히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모든 것들이 공덕이 되어 이 길을 가는 게 아닌가 생각하면, 행자시절은 정말 철저하게 잘 보내야 할 시간들임엔 틀림없다.
출가한 지 서른 해 동안, 산중에 있으면 산중에 있는 대로, 도심에 있으면 도심에 있는 대로 내게 주어진 일에 충실해 가며 은사스님 모시고 ‘순딩이’처럼 살아왔다. 이순耳順의 문턱에서 가끔, ‘내가 이 나이에 마을에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볼 때마다, 출가의 길을 걸은 게 그저 만족하고 감사할 뿐이다. 그러나 공부가 부족했다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가 없다.
취재·정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