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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강新疆 투르판의 베제크리크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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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여화 - 김진숙 2003년 08월 258호
중국에서 기차는 장거리 여행을 할 때 가장 사랑받는 교통수단이다. 특히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중국 대륙을 기차로 횡단하고픈 충동을 느낄 것이다. 역마다 기다리고 있을 이국의 정취를 만날 예감은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또한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을 동서로 횡단하는 노선은 불교가 전래되어 온 길을 거슬러 가 본다는 의미만으로도 당장 표를 사고 싶어진다.
돈황敦煌에서 막고굴莫高窟을 배관하고 일행과 함께 베제크리크 석굴을 배관하기 위해 돈황에서 가장 가까운 역인 안서安西 역으로 갔다. 투르판 행 기차표를 사려고 했으나 좌석이 매진되어 망설이다 결국 용감한 선배들을 따라 일단 입석으로 기차에 올랐다. 우여곡절 끝에 일행 4명은 모두 3등석 침대칸을 구했다. 우리가 탄 기차는 천산북로를 따라 중국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도시 가슈가르 행이었다. 밤 11시경에 출발하여 그 다음날 아침 7시경에 목적지 투르판에 도착했다.
투르판은 옛날부터 중국과 서역을 잇는 중요한 오아시스 도시의 하나로 한漢나라 때부터 군사적인 요충지로 중시되어 왔다. 이 지역에서 가장 번창했던 왕조로는 5~7세기의 고창국古昌國으로 불교도 번성하여 석굴도 많이 조성되었다. 이 시기의 유적으로는 고창고성高昌故城이 남아 있는데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7세기경에 당의 현장 스님이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투르판의 시내는 작은 수로들이 거미줄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 물들은 몇 천 킬로 떨어져 있는 천산의 눈 녹은 물을 끌어온다고 했다. 사막의 도시에는 모래만 있고 물은 귀할 줄 알았는데 투르판은 사막 한가운데 있는 물의 도시였다. 또한 투르판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포도의 산지로 곳곳에서 건포도 말리는 풍경을 볼 수 있었으며 머무는 동안 거의 포도로 끼니를 대신했다.
늦은 점심을 먹고 투르판 북쪽 끝에 위치한 화염산火焰山의 베제크리크 석굴로 향했다. 화염산은 말 그대로 불타고 있는 붉은 산으로 도저히 차에서 내릴 수도 없을 만큼 더워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은 곳이었다. 산등성이의 표면은 거칠게 파인 주름투성이로 이 땅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베제크리크 석굴은 투르판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석굴로 화염산 끝자락쯤에 있었다. 석굴 앞으로는 조그만 강이 흐르고 약간의 포도밭과 나무가 있었지만 뒤편으로는 끝없는 사막이었다. 베제크리크란 위구르의 말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란 뜻이다. 조성 연대는 6세기 말 수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14세기까지로 보고 있으며, 조성 당시의 전체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현재 약 57개의 석굴이 알려져 있다. 석굴은 장방형長方形의 구조로 정면에 본존을 안치하고 천장과 다른 벽은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석굴 안내원과 함께 배관을 시작하였으나, 이곳도 보존과 복원을 이유로 몇 개의 석굴들만 개방하고 있었다. 석굴은 전체적으로 훼손이 너무 심했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석굴이 있는가 하면 부분적으로 벽화를 떼어낸 흔적이 그대로 있고 남아 있는 장면들, 특히 그림 중에서도 얼굴 그 중에서도 눈 부분과 금박 장식 등은 모두 도려내지고 없었다. 이와 같은 현실은 베제크리크 석굴의 수난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첫 번째의 훼손은 14세기경에 이슬람교도에 의하여, 그리고 두 번째는 20세기 초 외국 탐험대에 의한 것이라 하였다. 이슬람교도들은 불상을 우상 숭배로 여겨 수많은 불상을 파괴하였고 탐험대, 특히 독일인에 의한 벽화 약탈이 가장 심해 보존 상태가 좋았던 벽화들만 골라 사각형으로 도려내 그들 나라로 옮긴 다음, 베를린 박물관에 석굴 모형을 만들어 다시 붙여 놓았으나 세계 2차 대전 중에 박물관이 불타버려 베제크리크 벽화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베제크리크 석굴 중에서 그나마 보존 상태가 좋아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은 제37굴의 ‘서원도誓願圖’이다. 높이 약 5미터 폭 3미터 크기에 그려진 벽화로 본존의 붉은색 가사와 권속들의 녹색 영락瓔珞 장식이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전체적인 양식은 중국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 굴은 보존을 이유로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아 아쉬움이 컸다. 다음으로 잘 알려진 것은 제39굴의 정면 벽의 오른쪽 윗부분에 남아 있는 일명 ‘각국사절도各國使節圖’이다. 이 그림은 원래 ‘석가열반도’의 일부분이었으나 아래 부분의 석가상은 없어지고 이것만이 남아 있다. 커다란 눈을 하고 있는 몽골인, 높은 코의 이란인, 터번을 두른 미얀마인, 그리고 한족漢族 등이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제9굴의 입구 양쪽 벽 아래 부분에는 위구르인으로 보이는 남녀 공양자상이 있는데 아마 당시 신분이 높은 사람인 듯 의관을 갖추어 입고 본존에게 공양을 올리기 위해 걸어가고 있는 듯이 표현되어져 있다. 이는 이슬람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 지역의 위구르인들 사이에서는 불교가 번성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텅 빈 한 석굴에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베제크리크 석굴을 복원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석굴의 전체적인 특징은 벽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고 본존인 불상을 아주 크게 그리고 천부天部나 공양자상을 아주 작게 그리고 있다. 본존은 대부분 불꽃 무늬의 화려한 신광身光과 두광頭光을 가지고 있으며 붉은색의 대의大衣를 걸치고 있다. 상의 얼굴은 중국 당나라 때의 불상의 모습과 비슷하다. 투르판보다 더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쿠차 지역의 석굴은 붉은색이나 화려한 장식문양은 보이지 않는 데 비해 이 석굴은 전체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석굴을 나오는데 왠지 작은 분노와 함께 울적함을 감출 수 없었다. 척박하고 무더운 이 사막에도 이처럼 화려한 열정의 신앙심이 있었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지켜왔는데 미개한 문명인들의 몰염치한 훼불 흔적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우리는 모두 묵묵히 베제크리크를 뒤로 하고 쿠차 행 열차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