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심은 스스로를 얽어매는 쇠사슬희천 선사는 주저 없이 곧 바로 답을 던진다.
“누가 그대를 묶었는가?”
초심자는 다시 묻는다.
“그러면 정토淨土는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습니까?”
“누가 그대를 더럽혔는가?”
초심자는 수없는 노심초사 끝에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깨달음을 체험한 선사는 주저 없는 간결한 대응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찔러준다. 이쯤 돼야 선지식의 살아 있는 가르침(活句開示)이라 할 만하다.
수행의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있어 의심은 문제해결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분별적 의문에 사로잡혀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만다면, 그 같은 의문은 도리어 문제해결의 장애일 뿐이다. 수행자에게 있어 분별심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얽어매는 사슬이다. 자신을 구속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다름 아닌 자기자신인 것이다.
이처럼 ‘이것은 좋은 것이다, 저것은 나쁜 것이다’라고 하는 분별심分別心이나 ‘이렇게 해야 할까, 저렇게 해야 할까?’하고 사량思量하는 마음은 선 수행을 방해한다. 훌륭한 선 수행 지도자는 사량분별하는 수행자의 심리적 상태를 즉시에 간파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단번에 깨뜨려 깊은 한 생각 즉 삼매三昧에 들어가도록 인도해야 한다.
삼조三祖 승찬 대사도 그의 신심명信心銘에서 밝히고 있다.
“지극한 도(至道)는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揀擇을 꺼릴 뿐이다.”
여기서의 간택이란 취사선택을 일컫는다. 즉,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본질적 의문으로 핵심을 붙잡고 늘어져야지 문제의 근본에서 벗어난 분별에 사로잡혀 옳고 그름을 논할 일은 아니다.
선 수행이 결코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쉽게 핵심에 도달하기 어려운 것은 사량분별을 초월하여 무분별의 경지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사량분별을 초월하는 의문이란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찾는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에 한결같이 몰입한 상태가 바로 삼매요 선이다.
화의畵意와 선심禪心의 결합일치結合一致
빠따산런(八大山人)은 팔세에 이미 시서화각詩書畵刻에 능했다고 하니 예술의 소양을 일찍부터 갖춘 사람이었다. 나라와 부모를 동시에 잃고 그는 자연 속에 은거하여 불문에 들어와 선승이 되었다. 선에 눈뜬 그는 자연을 깊이 있게 관조할 줄 알게 되었고, 그것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회화의 재능도 갖추게 되었다. 그에게 자연은 그림의 주제였고, 시작詩作의 대상이었으며, 깨달음의 요소였다.
즉, 화폭 위에는 그의 화의畵意와 선심禪心이 하나로 융화되어 표현되어 있다. 그의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다음과 같은 그의 선시禪詩가 저절로 떠오른다.
산도 사람도 말없는 곳에,
구름이 산새의 뒤를 따라 함께 난다.
흐르는 물가에 애처로이 핀 꽃,
담담하여 돌아갈 것을 잊었노라.
그림과 선이 하나 된 경지다. 떠가는 구름, 우짖는 산새, 흐르는 물, 애처로운 꽃 등은 역동적인 생명이지만 화폭에서 흐르는 시의 분위기는 깊은 침묵이 감도는 선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선가禪家의 목적은 명심견성明心見性에 있다. 선이 자연을 통해 이 도리를 깨닫는 것이라면, 화가의 목적은 그림을 통하여 인간성을 표현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화가는 자연을 그릴 때 자연의 섭리를 관찰하여 인간성품을 찾아내고 그림으로 표현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선가나 선화가가 다 같이 자연미를 그 정신적 배경으로 한다. 이와 같은 점에서 화의와 선심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빠따산런의 이 연꽃그림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것이다. 이 그림은 하단부를 비워서 공백으로 처리하고 상단부의 넓은 부분에 변화 있는 먹색으로 연잎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위가 무겁고 아래가 가벼운 이와 같은 구도는 감상자에게 불안감을 주기 때문에 잘 선택하지 않는 구도다.
빠따산런은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중국의 쩌우스신(周士心)은 《빠따산런과 그 예술》이라는 저서에서 그를 “통곡하고 눈멀고 벙어리 되어 발광할 정도로, 강렬한 반항과 극도의 분방奔放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쓰고 있다. 그의 자유분방한 삶의 궤적은 그대로 그림에 반영되어, 화법 자체를 무시해 버리는(無法而法) 기발함과 일탈의 예술로 완성되었다.
첩帖으로 된 작은 그림이지만 여백이 넓고 시원하다. 모든 것을 다 그리지는 않았지만, 여백 속에서 연당의 기분이 충분히 전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