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주 무제의 폐불과 순교승들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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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 김태형
1995년 04월 158호
북주 무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유교에 두고 불교와 유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게 되는데, 지난 달에 밝힌 도교와 불교의 논쟁 과정은 하나의 빌미에 불과한 것이었다. 또 다른 불교 탄압의 배경에는 서위西魏를 멸망시키고 북주北周를 건국한 우문호는 이민족 출신이라서 한족에 대한 콤플렉스가 작용하여 한민족의 유교지상주의를 실현하고자 했으며 문제와 효명제를 일 년 내지 삼 년 동안 재위시키고 살해한 뒤 그의 조카인 무제를 즉위케 하는 등의 정치적 요인도 중요하게 지리잡고 있다.
당시 약관 열여덟 살의 청년 무제는 숙부인 우문호의 영향으로 유교지상주의라는 건국 국시國是를 따랐고 동위를 계승한 숙적 북제를 병합하여 천하를 통일한 명실상부한 천자의 자리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기 위하여 무제는 부국강병 정책을 추진하고 이의 달성을 위해 국가 경제력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있던 종교 집단, 특히 불교가 가자고 있던 막대한 경제력은 그의 정책 실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북주 무제는 북주에서 여덟 개 주의 사만여 개에 이르는 사원을 철폐하여 귀족들의 저택으로 삼고, 삼백만에 이르는 승려를 환속시켜 군과 일반 백성으로 복귀시켰다. 불상과 경전은 불태워 버리고 삼보의 재화는 관가에서 압수하여 포상용으로 사용했으며 또 북제를 평정한 뒤에도 북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만 개의 사찰을 폐사시키고 이백만 명의 승려를 군과 일반 백성으로 복귀시켰다.
그러나 당시 불교의 숙정肅正을 요구했던 유생의 상소를 보면, ꡐ현재 승려는 이백만에 달하며, 비구니와 우바이는 승려의 처첩이 되어, 낙태로 죽인 자식이 부지기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불교계가 양적 증가에 비례하여 부패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북위 태무제의 폐불 이후 더욱 정치 권력과 밀착된 북위의 불교계는 물량 지향적인 불사, 곧 운강과 용문석굴 등 거대한 불사의 진행으로 불교의 외형만을 비대화 시켰는데, 이로써 막대한 양의 국고가 소진되기에 이르자 반대급부로 도사리고 있던 유교나 도교가 급기야는 불교의 타도를 외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북주 무제에 의한 폐불이 병합된 북제에서도 단행되자 정영사의 혜원慧遠(524`~592)은 “황제는 무력이 뒷배경에 있으므로 자유자재로 삼보의 완전한 폐지를 단행하고 있는데, 그 사상은 그릇된 편견에 빠져 있고, 그 행동으로 반드시 아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옥에서 끊임없이 받게 될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가”하며 극단적 발언으로 무제의 폐불에 대항했다. 이에 대해 무제는ꡒ불교를 완전히 폐지함으로써 만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지옥의 엄청난 고통도 달게 받으리라”고 했다. 그러자 혜원은 “황제는 잘못된 법에 따라 사람들을 인도하기 때문에, 만백성들도 현재 고업(苦業)을 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황재나 만백성들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 정해져 있는데, 만백성들이 어떻게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자, 황제는 끝내 대답을 거부하고 폐불을 단행했다고 한다. 도안스님은 폐불에 항의하여 단식 투쟁 끝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정애스님은 무제에게 “불교를 폐(廢)하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될 것ꡓ이라 간하고 종남산에 들어가 반석 위에 앉아 칼로 살을 베어 창자를 소나무 가지에 걸고 죽었다고 한다. 또 도립스님은 불교의 절멸을 막기 위해 무제에게 상소하여 그와 죽음을 무릅쓴 논쟁을 벌여 결국 당시 국립종교연구소인 통도관(通道觀)에 열 명의 스님을 주석하게 하였다. 이밖에도 도적(道積), 담연(曇延), 맹법사(猛法師)등도 무제의 폐불정책에 맞서 대항하기도 했다.
한편 무제의 폐불탄압을 피하면서 많은 스님들이 죽음을 무릅쓴 전법의 활동을 계속했다. 그 예로 북제의 사문 통인 혜광의 제자 도빙에게 사사한 영유(靈裕)는 상복으로 위장하고 승려의 행색을 감춘 뒤 동료 이십여 명과 함께 낮에는 세속의 전적을 탐독하고, 밤에는 불경을 담론하며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호법과 전법의 활동을 개속해왔다. 또 서인도 오장국 출신인 나련제려야사는 세속의 옷으로 삼의(三衣)를 감추고 난리를 피해 동분서주하면서 가
난하고, 병든 이웃을 돌보는 보살행을 실천하기도 했다.
북주 무제의 폐불(574)은 북위 무제의 폐불(446)로 초토화된 중국의 불교가 회생의 국면으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일어나 비록 오 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타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어서 사상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로 인해 중국 불교에는 말법사상이 널리 펴져 신행(信行(540-594))의 삼계교, 도작(562-645)의 아미타 정토교, 영유에 의한 보산(寶山) 석굴의 개감(開鑑), 정완(?~659)에 의한 방산(房山) 석경각조(石經刻造) 사업 등 말세관에 의한 갖가지 불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폐불의 영향으로 또 북위 태조 때 법과스님이 주장한 ‘왕이 곧 여래(王卽佛)’ 의 사상이 더욱 심화되어 무제 사후에 등극한 선제에게 불교의 부홍령을 청하면서 ꡒ군주는 바로 여래다. 왕공은 바로 보살이다ꡑ, ꡐ부처는 저절로 부처가 되지 않는다. 오직 왕이 있어야만 부처일 수 있다ꡑ라고 했다. 이는 범망경梵網經, 사분율四分律, 불본행경佛本行經, 살차니건경 薩避尼乾經, 순정이론置正理論 등에서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사문불경왕지론沙門不敬王者論의 원칙을 완전히 뒤엎는 발상을 실천하여 율장정신을 망각하고 불교의 교권을 왕권 밑에 두어 권력의 비호 아래 교권을 수호하겠다는 연약한 모습이었다.
북제의 불교를 짓밟은 무제는 그로부터 일 년 뒤(578)에 죽고 뒤를 이어 등극한 선제는 장종 백지공의 진언을 받아들여 579년 정월부터 4월까지 세 번에 걸쳐 조칙을 내리고 불도를 수행하는 것을 허락하고 장안과 낙양에 척호사陟岵寺를 설치하였다. 폐불의 악몽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했던 승단은 581년 정제가 등극하고 나서야 비로소 삭발염의를 할 수 있었다.
한가지 홍미로운 일은 폐불의 원인을 제공한 위원숭과 폐불을 일으킨 장본인인 무제의 사후를 다룬 「속고승전」의 ꡐ위원숭전ꡑ과 ꡐ법원주림ꡑ,ꡐ 역대삼보기ꡑ 의 기록이다.
이들 기록은 한결같이 무제는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으나, 위원숭은 과거 부처님을 시봉한 불제자였다는 이유로 지옥은 물론 삼계를 벗어났다고 전하는데 역시 팔은ꡐ안으로 굽는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 같다.
만일 지난해 법난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이와 연결시켜 볼 때, 누구는 불교도가 아니라 지옥에 가고 누구는 전직 승려였기 때문에 지옥에 가지 않는, 즉 인과응보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서는 먼 훗날의 불교사가들은 혹시나 없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