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 나의 어린시절을 지켜봐 주신 부처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해인리포트 - 본각
2003년 06월 256호
오랜만에 옛날을 회상해본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나에게는 특별히 행자시절이라는 기간은 없었다. 세 살부터 우리 은사스님이 키워주셨기 때문에 집이 곧 절인 셈이다. 굳이 행자시절이라는 말을 쓴다면 무척 긴 행자시절을 보낸 것이 된다.
온 가족이 태백산 홍재사로 출가하여 인홍 노사의 인도로 나는 인천 부용암에 계셨던 은사스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나의 은사스님과 노사는 절집으로 먼 사형사제간이 된다. 아이들에게 자비롭기로 이름이 높았던 은사스님께 어린 나를 특별히 배려해서 양육을 부탁하셨던 것이다. 우리 은사스님이 일생 나에게 베풀어주신 마음은 은사스님이기 이전에 어머니로서 자리하시는 분이다.
어린 시절 인천 부용암에서 있었던 일이다. 부용암 어른들이 모여 앉으면 6·25전쟁이야기를 했다. 인천 상륙작전이 있었던 지역인 만큼 공산군과의 대치도 치열했던가 보다. 그래서 어른들은 매일 전쟁이야기를 하면서 고생했던 일, 서로 어려웠던 일, 배고팠던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다. 옆에서 듣고 있던 어린 나에게는 이미 지나간 전쟁이야기가 아니라, 다시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을 갖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매일 예불시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어느 날 사시 마지를 올리는데, 아무리 정근을 하여도 마지가 올라오지 않는다. 옛날에는 기도하다가 염불 아닌 말을 하면 야단을 맞았기 때문에 마지가 올라올 때까지 계속 정근을 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 앞산의 돌을 깨는 발파소리가 대포소리처럼 천지를 울렸다. 나는 그 순간, ‘밖에는 전쟁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다 피난을 떠나서 마지도 올려주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하였다. 그 순간 치고 있던 목탁을 던져버리고 부처님을 쳐다보다가 얼른 탁자 밑으로 숨어버렸다.
그리고는 탁자 밑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대포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사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나서 함께 살던 사숙님이 밖에서 “법당에 누구 있나?” 하시면서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반가워서 “사숙님, 피난 가시지 않았어요?” 하면서 내가 탁자 밑에서 기어나오니까, 사숙님이 “너, 왜 거기서 나오니?” 하고 의아해 하셨다. 공양주 보살님이 마지 올리는 것을 잊어버리고 대중은 공양을 마쳤고, 나는 마지를 기다리다가 채석장의 발파소리를 대포소리로 착각하여 전쟁이 일어난 줄 알고 탁자 밑에 숨었던 것이다.
공양주 보살님이 야단을 맞는 것으로 일은 수습이 되었지만, 그때의 심정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모두가 피난 가버린 텅 빈 절에 부처님과 나만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슬프기도 하고 부처님과 이 곤경을 헤쳐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탁자 밑에 숨어서 부처님 발을 잡는 기분으로 애원하듯 기도를 했던 것이다.
지금도 가끔 혼자서 부처님을 뵈면 탁자 밑에 기어들어가면서 힐끗 부처님을 쳐다보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대포소리에도 부처님은 조금도 놀라지 않으시고 미소짓는 모습 그대로 웃고 계셨다. 나의 행동을 부처님께서는 얼마나 재미있어 하셨을까 하는 마음이 간혹 들곤 한다. 나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철부지 나의 어린 시절을 지켜보아 주신 부처님은 항상 나의 편이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역경을 이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다시, 내가 행자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간은 열네 살 때 사미니로서 석남사에 갔던 때이다. 삼 년 정도 인홍 노사께서 나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석남사로 부르신 것이다. 그때 석남사에는 우리 모친과 자매를 부처님께 인도해주신 인홍 노사가 주지로 계셨다. 석남사는 인홍 노사와 그 문도에 의해서 오늘날 비구니 종립 선원으로까지 발전한 유서 깊은 수행도량이다. 온 가족이 출가하여 당시 태백산 홍재사에서 인홍 노사께 의지하였고, 노사의 인도로 나는 인천 부용암에서 성장하였다. 그러한 나를 다시 석남사로 데리고 오셔서 올곧은 수행자로 살아갈 수 있는 정신적인 밑거름을 듬뿍 안겨주셨던 기간이다.
그때 석남사에는 인홍 노사의 제자이신 불필 스님, 백졸 스님, 법용 스님, 혜주 스님과 큰언니 혜근 스님, 둘째언니 적조 스님 외에 태백산에서부터 나를 알고 계시는 많은 어른 스님들이 함께 계셨다. 그리고 나의 정신적인 행자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석남사에서는 그 당시 가을이면 낙엽이 된 상수리 나뭇잎을 차곡차곡 모아서 겨울에 변소 휴지 대신으로 썼다. 우리 어린 사미니들과 행자들은 가을 내내 상수리 나뭇잎을 줍는 일로 바빴다. 지금은 변소에 나뭇잎으로 화장지를 쓰는 일이 없지만, 그때는 가을에 낙엽을 모아서 초여름 새잎이 나올 때까지 화장지 대신 사용했다. 상수리 낙엽을 주우러 다니는데 법 노스님은 관광객이 꺾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가지를 행락객으로부터 빼앗아서 우리에게 주셨다. 홍시가 되면 먹으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우리는 방에 걸어놓고 홍시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홍 노사께서 우리들 방을 둘러보러 나오셨다가 감나무 가지가 벽에 걸린 것을 보시고 불호령을 치기 시작하였다. 수행인이 나뭇가지를 탐해서 꺾은 것도 잘못이고, 더더욱 수행자가 거처하는 방을 감나무 가지로 치장을 했다는 것이다. 수행자는 자신의 모습을 꾸며서도 안 되지만 생활환경을 치장하는 것도 도道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에 치우쳐 사는 것이라는 꾸중이었다.
단지 법 노스님께 얻은 감나무 가지를 걸어놓고 홍시가 되기만을 기다리다가 그렇게 호된 꾸중을 만난 것이다. 우리는 처음 몇 번은 변명을 시도해보기도 하였지만 워낙 불호령이시라서 결국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그 긴 꾸중을 다 들어야만 했다. 노사가 방을 나가신 뒤에 감나무 가지는 누군가에 의해서 이미 마당 한켠 헛간에 내버려져 있었다. 쳐다보기도 싫었던 것이다.
이제 법 노스님도 떠나가시고 인홍 노사도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지금은 억울했던 기분보다는 그렇게 수행자의 정신을 지켜주려고 꾸중하셨던 어른들이 그립다. 그리고 그날의 꾸중이 오늘에 이르러서도 수행자는 겉치장에 정신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로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석남사에서 잊혀지지 않는 추억담이 있다. 석남사 골짜기는 하도 아름다워서 옥玉이 흐르는 계곡이라는 의미로 ‘옥류동’으로 불린다. 하루는 도반들과 국수와 양념간장과 솥을 들고 옥류동으로 올라갔다. 어른스님들께 국수를 삶아먹으면서 하루 종일 놀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서 모두가 들뜬 기분이었다. 도반 대여섯이 모여서 먼저 국수를 삶기로 하였다. 국수를 삶는 동안 나뭇가지를 꺾어서 젓가락을 만들고 기다리고 있는데, 국수를 삶은 도반이 막내격인 나보고 국수를 씻으라고 했다. 국수 삶은 솥을 겨우 들고 계곡물이 제일 힘차게 흐르는 여울목에 솥을 들이대는 순간, 옥류동 계곡은 온통 국수 천지가 되었다. 일순간의 일이어서 어떻게 손을 써볼 겨를도 없었다. 솥단지는 비어 있고 계곡에는 떠내려가는 국숫발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 엄청난 현실 앞에서 어느 누구도 말을 할 기력이 없었다. 국수는 다 떠내려 가버렸고 즐겁던 일도 사라져버렸다.
배만 몹시 고파서 망연했던 그때의 일이 생각난다. 도반들은 다 잊어버렸겠지만, 일을 저지른 장본인인 나는 국수를 먹을 때마다 그때의 아쉬움과 도반들에게 미안했던 마음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모두가 이제는 인생의 중반을 넘기고 각각 자신의 처소에서 수행정진하고 있다.
나는 어린 날의 국수사건으로 대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갖게 되었고,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라는 교훈으로 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