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초, 조계종 총무원 인사에서 서열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문화부장의 소임이 탁연 스님에게 맡겨졌다는 소식은, 기삿거리를 찾아헤매는 기자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뉴스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탁연 스님이 비구니스님이기 때문. 임명장 수여식이 거행되는 시점까지도 논란이 계속되자, 탁연 스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총무원을 향한 ‘내친 걸음 계속 가자’는 결론을 내리고 들어선 총무원 청사에는 기자들이 임명권자보다 더 애타게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화부장 자리에 비구니스님을 임명하다
아마 3월 1일이었을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잠시 일본에 갔다가 귀국해 산청을 향하는 길목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 총무원의 부장자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운전중에 받은 갑작스런 청에 대수로 생각지 않고 ‘알았다’로 맺음하고 나서 곰곰 생각해보니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일단은 매일 정시에 출퇴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익숙지 않은 리듬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지마자 다시 전화해 ‘고사’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총무원 내부에서는 탁연 스님 의사와는 별개로 비구스님들 사이에서 “된다, 안 된다”의 논란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문제는 탁연 스님이라는 개인의 자질과 능력 차원이 아니라, 비구니에게 종무행정의 중요소임을 맡길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중간과정은 탁연 스님은 까맣게 모르는 일이었다. 뒤늦게야 전국 비구니의 위상이 스님의 두 어깨에 얹혀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종무경험이 없는 스님이 선택되었을까.
“법랍도 30년이 넘고 세랍도 50이 넘었으니 무난하다고 윗분들이 판단하신 모양이에요. 너무 어리면 견디기 어렵고 나이가 많으면 부담스럽죠. 그 외에도 몇 가지를 고려하셨겠지요.”
그 몇 가지란 어디 내놔도 흠잡히지 않을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마 일본 입정대立正大 박사학위 획득이라는 학력이 있을 것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소박하고 후덕해 보이지만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당찬 성격도 고려됐을 것이다.
여섯 살 때 이미 삭발시켜 달라 졸랐고 대학입학 통지서 받고 바로 출가
스님이 출가한 것은 19살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시험 합격통지서를 받은 후였다. 대학에 떨어져 출가했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탁연 스님에게 출가는 당연한 코스였다.
스님은 이미 여섯 살에 어머니를 따라 머리를 깎았던 경험이 있다. 6·25 때 스무 살의 나이로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스물넷 되는 해에 출가를 선택했다. 불심이 깊었던 친할머니는 며느리의 출가결심을 도왔고, 절까지 동행해 머리 깎을 때까지 함께 지내기까지 했다. 그때 여섯 살 먹은 손녀딸아이(탁연 스님)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삭발하던 날, 어미가 머리 깎는 모습을 보면 울먹일까봐 밖으로 데리고 나오자 눈치 빠르고 당찬 아이는 “괜찮아! 나도 알고 있어. 들어가자.”고 하더란다. 그리고는 자신도 머리를 깎아달라고 졸라 어머니와 함께 삭발을 했단다. 그리고 한달 후 아이는 할머니와 함께 산을 내려왔고, 13년이 지난 후에도 생각은 변치 않았고, 탁연卓然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어머니스님은 바로 산청 심적사에 계시는 벽해 스님이다.
탁연 스님은 어머니스님을 자주 찾아 뵙는 편이다. 총무원에서 전화가 걸려오던 날도 봉녕사 강사 휴식년을 맞아 쉬면서 잠시 볼일이 있어 갔던 일본에서 돌아와 심적사로 향하던 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 벽해 스님은 탁연 스님의 참여를 극구 말리셨다고 한다. “드러나지 않고 물처럼 살라”는 것은 벽해 스님이 늘 강조하시는 바였다.
비구니 종무행정 참여 막을 종헌·종법의 근거는 없어
어쨌거나 그것은 전반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향상돼가는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불교 내적으로도 과반수를 차지하는 비구니스님들의 왕성한 활동과 능력발휘가 이제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된 현실상황이 저변에 깔려 있다.
일부 비구스님들이 문제 삼았던 조계종단 종헌종법에 위배된다는 주장은, 2002년 종헌종법을 개정하면서 사문화된 조항으로, 비구니스님들의 종무행정 참여를 막을 제도적 근거는 이미 삭제된 상태이다. 아직도 모르는 스님들이 많지만.
그러나 성차별의 정서까지 삭제된 것은 물론 아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성차별의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는 사안. 불교에서는 이제 막 스타팅 테이프가 끊어진 셈이지만, 《율장》에 분명히 명시된 “100세 비구니라도 초하비구(初夏比丘, 하안거 한철 난 비구)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조항은 성차별의 가장 막강한 근거 아닌 근거가 되고 있다.
불제자로서 부처님의 말씀을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어떤 스님들은 불경에 위경僞經이 많듯이 《율장》역시 당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만이 담겨 있는 것인지, 그 이후 첨삭되었을 수도 있기에 재해석 내지는 검토되어야 한다고 하기도 하지만, 탁연 스님은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없다.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쪽이다.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라 해서 아흔여덟 가지가 더 많은데, 계율을 보면 알겠지만 그 내용을 보면 거창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생활의 소소한 생활태도를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았거든요. 부처님 가르침의 덕목의 중요한 부분이 버리는 것인데, 경험을 통해 볼 때도 여성들은 ‘아깝다’는 마음에 후일을 생각해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경향이 있어요. 세간사에서는 미덕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수행의 측면에서 볼 때는 그런 성향들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있어서는 버려야 할 요소들이죠.”
어떤 계율이라도 시대에 맞게 융통성 발휘할 수도
요즘 사람들은 ‘평등’이라는 말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비구니 스님들 중에도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분들도 있다. 그런 이들은 자주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나 스님이 생각하는 진정한 평등은 자신이 처한 위치를 가장 잘 지키는 것이다.
“세 살 먹은 애는 세 살 먹은 애답게, 100살 노인은 100살 노인답게, 비구니는 비구니답게, 비구는 비구답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평등 아닐까요?”
스님은 아마 자신의 자리와 분수, 처지를 알고 행동하는 조화로운 세상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답다’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그렇다고 스님 마음이 무심으로 일관됐던 것은 아니다. 비구니법을 충실히 지키려 애쓰고 그것을 가르치고 있었던 입장이지만 비구니로서 자괴감에 빠졌을 때도 물론 많았었다.
7~8년 전 수계산림受戒山林에 갔을 때였다. 불교에서는 출가 대중이 한 자리에 모이면 품계 별로 앉게 되어 있다. 품계는 법랍에 의해 결정되는데, 비구스님들이 품계 순으로 앉고 그 다음이 비구니가 앉게 된다. 그러니까 법랍이 아무리 높은 비구니스님이라 해도 가장 낮은 품계의 비구스님보다 낮은 자리에 앉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사미 사미니 순으로 앉는다. 그것까지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살다가 보면 공·사석公私席에 비구·비구니가 모여야 할 때가 더러 있다. 언젠가 그런 자리에서 인사를 하게 되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더니 법랍이 높은 비구스님들은 오히려 맞절을 하지만 젊은 스님들일수록 율장의 원칙대로 절을 받은 모습에 무척 속이 상했던 적이 있다.
“그것도 분별심이죠. 법랍이나 세랍이 높건 낮건 모두 불성을 갖고 있으니 부처님께 절한다 생각하면 문제될 것이 없는데, ‘분별심이다’ 하고 자신을 질책하고 말았지만 한동안 자존심이 상했지요.”
원래 의식은 그렇다 해도 요즘은 많은 경우 융통성을 발휘해 맞절을 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도 율장에 ‘고기 먹지 말라’ 했지만, 아픈 이에 대한 예외조항을 두었고, ‘가죽신을 신지 말라’ 했지만, 사막을 건널 때는 신어도 좋다고 하셨어요. ‘돈 가지지 말라’ 했지만, 요즘 돈 없이는 꼼짝도 못합니다. 율을 바꾸지는 못해도 상황에 따라 개차開遮할 수 있는, 어찌보면 또 다른 지혜가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어려운 일보다 새로운 일에 푹 빠져 지내는 재미가 커
탁연 스님이 총무원에 입성한 지 벌써 3개월째 접어들었다. 문화부장으로 임명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의 걱정이 있었다. 지금까지 작은 절의 소임 한번 살지 않고 공부만 해왔던 이력이 더욱 우려를 낳았다. 행정경험이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정치라면 정치일 수도 있는데, 그 풍토를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곱지 않은 시선들도 있을 테고. 그러나 스님은 의외로 적응을 잘 해가고 있었다. 얼굴은 밝고 활기있어 보였다. 다른 스님들과의 관계는 한달 정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아무 문제도 없단다. 스님들은 원래 지난 것들은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이다. 행정경험은 처음이지만 일도 재미있단다.
요즘 문화부에서는 문화재청장의 차관급 승격(현재는 1급)과 남북문화교류 시대를 대비하여 북한의 개성 지역 문화재관리를 전담하는 부서를 정부에 신설토록 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새로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어요. 언제 내가 학인들을 가르쳤던가 싶어요. 예전부터 해왔던 일처럼 그저 이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노비구니스님들의 선택은 혜안에서 나온 것이었던 모양이다.
부담은 있다. 비구니를 대표하고 들어갔는데 “일을 시켜보니 엉망이다”라는 소리를 들어 비구니 망신을 시키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늘 그래왔듯이 오늘도 스님은 현재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취재·정리/이연정, 사진/문영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