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 대사의 호국불교적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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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정기철
2003년 06월 256호
한국불교에 있어 호국신앙은 일관된 근본정신으로 불교를 흥하게 함과 동시에 깊게 믿는 것이 나라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라는 신앙이다.
신라에서의 불교의 전래는 삼국정립시대三國鼎立時代의 법흥왕 14년(527)에 이루어졌고, 문무왕 8년(668)에는 통일신라가 성립되었다. 그 사이에 많은 승려가 중국에 가서 유학하였다. 특히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이 주목된다.
원광은 귀국 후 정치적으로도 활약하고 불교가 국가에 유익하도록 노력하였다. 세속오계世俗五戒로써 국민도덕을 수립하였으며, 스스로 전쟁터에 나가 백제군과 싸워 결코 물러서지 않는 임전무퇴의 화랑도정신으로 승화되었다. 자장도 귀국 후 문물제도를 확립하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워 국방사상을 고취하여 불교에 의한 호국사상을 주창하였다. 뒷날 귀족들의 문중에서 문무文武 양도에 뛰어난 청소년 중에서 불교정신에 빼어난 청년들로 화랑집단을 형성하였는데, 이것은 자장 등의 불교 호국사상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자 신라불교는 점차 국가불교적인 호국불교 성격이 강화되었다. 자장이 그 조영에 관련된 황룡사를 중심으로 해서 중국 당대唐代의 불교를 능가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황룡사의 존재로 인한 신라국운의 융성은 이웃나라 일본에 영향을 미쳐, 성무천황聖武天皇에 의한 동대사東大寺 조영이나 국분사제도國分寺制度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경덕왕 시대의 불교의 융성은 특기할 만하다. 불국사 석굴암은 그 시대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는 당나라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만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원측圓測·원효元曉·의상義湘·태현太賢 등 고승이 배출되었다. 원측은 현장玄 문하 중에서도 뒷날 서명사파西明寺派라고 불려진 일파의 원조가 되었다. 그의 유식교학唯識敎學은 후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원효는 일체의 교학을 회통會通시키는 화쟁和諍의 이론을 제창하여 동아시아 일원에 의용依用되었으며 의상은 해동화엄의 원조로 호칭되었다. 태현은 경덕왕시대의 불교계의 출중한 지도자였다.
정치적으로 신라와 일본은 심각한 대립이 존재하였으나 문화면에서는 폭넓은 교류가 이루어졌고, 일본은 신라로부터 많은 것을 전수 받았다. 일본은 수많은 유학승을 신라로 보냈다. 특히 동대사東大寺 조영에 앞서 《화엄경》을 개강한 심상審詳은 신라에 유학하였으며 많은 불교전적을 받아감으로써 신라불교는 나라(奈良)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국가발전의 원천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음의 고려왕조라는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불교국가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는 것이다.
고려왕조는 이와 같이 신라불교를 그대로 이어받아 국교로 삼았으며, 연등회·팔관회八關會 등의 연중행사와 승과僧科 등을 제정하여 승려의 신분을 귀족 이상으로 격상시켰고 체관諦觀의 천태종天台宗, 균여均如의 화엄종, 보조普照·백운白雲·나옹懶翁·태고太古 등의 선종禪宗 고승들이 나왔으며, 특히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왕자로서 출가하여 불교서적을 널리 수집하여 개판開板하였다. 그리고 고려 불교문화 뿐만아니라 민족문화의 대표격인 해인사 소장의 팔만대장경은 고려대장경이라 하여 외적을 물리치는 호국사상의 결정인 것이다.
조선왕조시대에 들어와서 불교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대체로 쇠퇴하였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의 호법과 세종·세조의 호법정책으로 다른 시대에 못지 않는 호국불교 사상을 발휘하였다. 무학 선사無學禪師를 비롯하여 함허涵虛·보우普雨·서산西山·사명泗溟 등은 그 대표적인 고승들이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도 그 근본의도는 불교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원각사圓覺寺의 고층탑高層塔은 민족사상 통일의 상징이었다.
임진왜란 때의 외적침략에는 서산西山·사명泗溟·처영處英·영규靈圭 등이 속출하여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처한 나라의 위기를 구출하는 데 앞장섰다. 그뿐 아니라 병자호란 때도 애국 불교도들은 남한산성·북한산성에서 계속 서울을 수비하였으며, 사원경제가 고갈상태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불교는 평소에는 포교布敎와 역경譯經·도제양성徒弟養成에 전념하다가도,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졌을 때마다 전통적으로 나라와 겨레를 위해 국난극복에 앞장서왔던 것이다. 그 상징적인 존재로써 해인사에 봉안되고 있는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려팔만대장경을 자랑스럽게 꼽을 수 있고, 그 법력으로 미증유未曾有의 국난인 임진왜란에도 영산靈山 가야산 주변일대에서 창의기병倡義起兵한 이 고장 출신 남명문도南冥門徒인 정인홍鄭仁弘과 김면金沔의 의병군단義兵軍團이 봉기하여 나라와 해인사를 끝까지 수호하였다.
신라 불교를 이차돈異次頓, 고려 불교를 도선道詵이 개창한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의 불교는 무학 대사無學大師가 자리매김하였다. 왕조교체로 조선조 불교가 고려조의 그것과는 그 성질과 형세를 달리하였지만 정교政敎를 융합시키기 위하여 불교를 호국적으로, 사찰을 비보裨補한 것은 도선과 우리 고장 합천이 낳은 위대한 고승인 무학자초無學自超가 한가지였다.
<조선국태조왕사무학대화상朝鮮國太祖王師無學大和尙>이란 최존칭을 받는 대사는 불법에도 뛰어났지만 왕권교체기에 있어서 새 왕조의 초창기에 태조 이성계와의 절친한 인간관계로 불교를 보호함으로써, 더욱 알려진 불세출不世出의 고승이다.
대사가 왕사로 재임 중 해인사 고탑이 중창되고,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봉안되었던 고려대장경판이 삼재팔난이 미치지 않는 가야산 해인사로 옮겨짐으로써, 임란壬亂과 호란胡亂의 전화를 이겨내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보존되어 성스러운 역사를 재창조하고 있다. 새 왕조의 한양전도漢陽奠都를 성공시켜 600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적인 대도시로 떠오른 서울의 초석을 놓은 것도 도참사상圖讖思想의 대가인 무학 대사의 혜안慧眼이 이루어낸 위대한 업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