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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불교의 이념과 나아갈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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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박희승 2003년 06월 256호
호국불교의 이념과 나아갈 방향 이제는 ‘호국불교’ 하면, 무언가 낡은 언어요 구시대의 흘러간 옛 노래쯤으로 치부되는 느낌마저 든다. 심지어 그것은 굴절된 역사의 산물로까지 그려진다. 그러나 호국불교에는 그렇게 일방으로 다루어질 수 없는 역사성과 긍정성 또한 가지고 있다.
호국불교는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되어 우리 국토와 민족을 보호하고 강성하게 했던 주요한 힘이요 신앙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국불교를 구시대에 한때 번성했지만 지금은 용도 폐기된 불교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한국불교의 역사성과 그 가치를 무시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며 한국불교사를 수놓은 역대 고승들의 존재성과 찬란한 불교문화의 가치를 없애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여하튼 한국불교의 큰 축이 호국불교로 거명될 정도로 그것이 끼치는 사회, 문화, 정치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했다.
이 자리에서는 지금까지 우리 불교역사의 한 축을 형성해 왔던 호국불교의 이념을 살펴보고, 그것이 우리 민족과 불교에 깊은 영향을 끼쳐 왔다면, 그것을 오늘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말해보고자 한다.
‘호국불교’는 ‘호국’이라는 말과 ‘불교’가 합성된 용어이다. 불교이기는 한데 호국불교라는 말이다. 불교의 순수한 가르침에 호국이라는 말이 첨가된 것이다. 80, 90년대에 불교계를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던 ‘민중불교’ 역시 이와 비슷한 개념이다. 이러한 불교는 불교의 순수성으로부터는 다소 일탈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순수에서 벗어났다는 것에는 개선 내지 발전된 모습이라거나 참여했거나 응용된 모습이라는 긍정적 측면 역시 가지고 있다.
예전에 순수시와 참여시 논쟁이 인적이 있다. 역사와 현실이 암울하고 강압적인 제도가 민중의 삶을 억압하고 있을 때, 그러한 시대의 시인은 현실과 상관없이 인생의 낭만적 아름다움만 노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입장이 그 논쟁의 핵심이었다. 과연 역사의식 없이 인생의 아름다움만 노래하는 순수시가 옳은가, 역사에 직접 개입해서 그 역사를 개선하게끔 노래하는 참여시가 진정한 시인가? 필자는 후자에 마음이 끌린다. 그렇다고 전자의 형태에 대해서 일방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원형과 순수한 가치를 보존하는 것은 진정 중요한 일이다. 여하튼 호국불교는 이렇게 참여의 일종으로 본다는 측면에서 불교가 역사와 민족적 현실에 응대하는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참여했던 호국불교의 모습이 건전하고 바람직했을 때는 세상의 귀감이 되는 것이지만 그 형태가 잘못되거나 심각하게 왜곡되었을 때는 청산해야 할 산물로서 남기도 하는 것이다. 불순했던 불교, 오염된 불교, 굴절된 역사의 산물로서 호국불교는 이 후자의 경우를 지칭한다.
그렇다면 호국이라 할 때, 그때의 그 국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국의 의미는 중생들이 살아가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자 환경을 포함한 터전이요, 넓게는 거기서 살아가는 국민들까지 포함한다. 국민(민중)을 보호하는 측면도 호국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국왕도 이 호국에서 말하는 ‘국’의 범주에 들어가기도 한다.
경전에서는 중생들이 보답해야 할 네 가지 은혜 중 하나로서 국가나 국왕의 은혜를 거론했으며 선 수행을 하는 수선 납자들도 토지연土地緣을 중요시했다.
국가나 토지는 중생들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구도의 길을 가고 성불해 나가는 치열한 삶의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이 없다면 구도의 과정과 성불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호국은 중생들이 불법을 닦고 불법을 실현해 나가는 공간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다. 불법이 살아 있는 국토라면 그것은 불국토를 말한다. 따라서 호국은 현실을 불국토로 가꾸며 불법이 살아 있게 만들기 때문에 호법의 의미로 확대된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정법을 보호하고 그 정법을 확대해 나가며, 정법을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에서도 인간을 비롯한 산하대지, 산천초목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불성을 가지고 있는 국토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깨달음을 하나하나 성취해 나가는 삶의 현장을 구축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은 불자로서의 의무이기도 하다.
흔히 대표적인 호국 경전으로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經》과 《법화경》, 그리고 《금강명최승왕경金剛明最勝王經》을 든다. 이 중에서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은 줄여서 《인왕경》으로 일컬어지는데, 거기에서는 어진 국왕이 반야로써 국가를 통치할 것을 강조한다. 반야로써 국가를 통치하면 부처님을 비롯한 천신이 나라를 보호해준다는 것이다. 국가의 지도자가 반야의 지혜로 나라를 통치한다는 것은 불법으로 그 나라와 백성들을 다스리며 국정을 운영해 나간다는 의미다. 그러한 나라는 분명 불국토이거나 불국토를 실현해 나가기 때문에 호법선신들이 국토를 환난에서 보호해주며 사람들로 하여금 경애심마저 갖게 만든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신라시절에는 100명의 고승을 초청하여 왕에게 《인왕경》을 강하는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이는 신라의 전륜성왕이라 불리는 진흥왕 때 생긴 일이다. 전륜성왕은 법으로써 나라를 통치하며 구체적인 경제정책과 평화정책으로 부의 공정한 분배와 평화를 도모하는 왕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호국의 한 범주로, 국왕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것은 이러한 전륜성왕으로서의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찬양이지 단순한 위정자나 권력자에 대한 은덕을 기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호국의 바람직한 방향과 잣대는 그것이 불교의 진리와 합치하는가, 그 방법은 불교적으로 정당한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진정한 호국은 평화로운 국토의 건설이며 법이 살아 있는 나라를 지키고 건설하는 것이며 행복이 실현되는 나라를 일구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라를 통치하는 지도자를 공경하고 받들며 그렇지 않은 지도자를 견제하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끔 하는 데 있다고 본다. 따라서 오늘날의 호국은 한 나라의 문화, 사회, 정치 전반이 올바로 서 있는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며, 그러한 모든 것들이 올바로 움직이게끔 국가 정책에 참여하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국가정책 전반이 정법에 바탕을 둔 불교의 사상과 행동양태로 전개되는 모습도 호국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계할 바 그 호국은 그것이 잘못 일탈되어 사적인 이권에 개입된 특정 권력이나 위정자와 야합하고 결탁한 모습이다. 또한 불교가 맹목적인 국가종교로 화하여 남의 나라를 침탈하는 데 이용되거나 군사적 폭력을 사용하는 데 이용되었다는 점도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이 자리에서 폭력의 문제는 세세하게 거론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옛 시대의 호국과 관련된 전쟁 상황에 대해서 일방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오늘날 이 시대에 참여하는 불자들의 올바른 태도는 비폭력과 평화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제는 순수불교 참여불교, 새로운 형태의 참여불교의 모습으로 호국의 이념을 재정립하고 새롭게 살려내야 하리라고 본다.□


오늘에서 바라본 서산, 사명 대사의 호국활동

박희승 / 조계종 포교원 연구차장

한국불교사에서 호국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서산, 사명 대사이다. 400여 년 전 두 스님의 활약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 출가 수행자는 지계持戒를 엄격히 하였다. 불자 5계에 ‘살생하지 말라’는 것은 제일 계율이다. 또한 수행과 전법을 본분사로 하여 세속 활동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 승가는 전쟁과 무관하지 않았다. 삼국, 통일신라 시대에 자장, 의상, 원광 법사로 대표되는 승가는 불교정신으로 국왕의 전쟁을 비롯한 통치행위를 바르게 이끄는 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승가는 사찰의 토지가 방대하였고, 이의 경영을 위하여 상업 활동까지 하였다. 고려 말기에 승가는 정치·군사세력화되어 그 폐해가 극에 달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신흥사대부들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에 주목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이 개국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조는 숭유억불의 법난시대였다. 그것은 고려 후기 승가의 세속화에 따른 업보였다. 종단은 강제로 통합되었다 해체당했고, 스님들은 환속되거나 신분 강등이 일어나 8천민賤民으로 도성출입이 300년간 금지될 정도였다.
다만, 명종 때 보우 대사의 원력과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일시 교단과 승과제도가 부활되면서 서산, 사명과 같은 인재가 배출되어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큰 활약을 하게 된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조선은 위기에 빠졌다. 유교이념의 조선은 당쟁으로 국력 결집에 실패하고 일본의 침공에 무너져 국왕은 도성을 내주고 신의주로 피신하여야 했다.
이처럼 조선왕조가 더 이상 위기 해소 방안을 찾지 못할 때 서산 대사는 국왕 선조의 부름을 받았고, 왕은 대사에게 의승의 궐기를 부탁하였다. 칠순의 서산 대사는 전국 산사에 궐기문을 돌려 5천여 의승군이 결집되었으며, 서산 대사에겐 ‘팔도선교 도총섭’이라는 승직이 내려졌으나 고사하고 산으로 돌아갔다. 의승군은 평양성 탈환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활동으로 승리의 주력이 되어 명나라 군대와 조선군으로부터 신뢰를 받게 되었다.
사명 대사는 일찍이 금강산으로 들어온 일본 군사를 설득하여 물러나게 하였고, 이후 스승 서산 대사의 천거로 승군 도총섭 소임을 맡았다. 사명 대사는 이후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사퇴를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의승군의 활동을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군수와 공병, 그리고 외교 활동으로 돌렸다. 특히 대사는 일본군이 불교를 신봉하여 스님들에게 예경한다는 점을 활용하여 ‘승려’ 신분으로 적진을 내왕하며 화평과 철군을 종용하였다. 일본군이 철수하여 전쟁이 끝나자 선조왕은 사명 대사를 일본에 특사로 보내 포로가 된 조선인들의 귀환을 설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 조선 승려의 정신문화를 알리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많은 일본인들을 감화시켰고 포로 귀환에도 큰 성과가 있었다. 이것은 승려가 아니면 불가능한 활동이었다. 서산, 사명 대사 이외에도 영규, 의엄, 쌍익, 처영, 해안, 신열 대사 등 많은 의승장과 의승들이 산에서 내려와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다.
많은 의승들의 호국 활동으로 전쟁은 조선에 유리하게 반전되었고, 전투 과정에서 의승들의 용맹과 활약상으로 조정과 유생들의 승려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달라졌다. 선조왕은 사명 대사에게 ‘도총섭’뿐만 아니라 ‘당상관’의 품계까지 부여할 정도였다. 서산, 사명의 호국 활동을 통하여 숭유억불정책의 조정은 인식을 전환하여 승려를 억압하기보다는 의승군을 국가 방위에 활용하는 일부 정책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남한산성·북한산성의 축조와 수비, 왕조실록의 사고史庫 수호를 위한 전등사·영감사·각화사·안국사의 승군 설치, 금정산성 수비 등의 군역을 담당하기에 이르렀다.

결론적으로 서산, 사명 대사의 생명 존중, 중생 구제를 위한 호국 활동은 억불시대에 불교 승가의 위상을 제고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승군의 제도화의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스님들은 다양한 군역 의무를 져야 했고, 이에 종사한 승려가 군사조직의 문화와 관행을 승가 안으로 유입시켜 이것은 또다시 조선 후기 승려의 정체성에 혼돈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개화기에 다시 도래한 일본불교에 한국불교의 유구한 전통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일제 강점기와 분단시대를 거치며 스님들이 지계와 본분사의 가치보다 대처와 같은 파계를 온정적으로 바라보거나 국민의 의무를 우선시하는 풍토와 관행으로까지 이어졌다. 더구나 일제와 군사독재정권은 이를 통치이데올로기로 정교화시켰던 것이다. 그 반대로 이것은 오늘날 승가 안에 지계정신의 해이와 폭력적인 군사문화에 관대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1994, 1998년 종단 폭력사태도 이와 무관하다고만 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조선조 조-일 전쟁 시기에 서산, 사명 대사의 호국 활동은 지계정신이라는 이상과 전쟁 참여라는 현실 속에서 생명 존중, 중생 제도를 위하여 현실 참여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나, 사회역사적으로 또다른 문제를 승가에 파생시켰던 것이다.
이제 오늘에서 서산, 사명 대사의 호국 활동을 사회역사적 산물로 이해하면서도 냉철한 평가를 통하여 진정한 불교정신과 호국 활동의 내용을 새롭게 정립할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