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건물을 짓게 되면 들보를 올릴 때 성대하게 자리를 마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들보를 올리는 의식, 즉 상량식上梁式을 거행한다. 이때 특별히 문장에 능한 사람에게 부탁하여 상량문을 받기도 하는데, 이 글에는 그 집 또는 집주인의 내력, 집을 짓게 된 전말, 동서남북 상하의 여섯 방위를 두고 시로써 읊는 양송梁頌, 들보를 올린 뒤 신명께 바라는 기원의 내용 등을 기술하는 것이 일반적인 체제이다. 이 글은 양송을 제외하고 전문이 장단구長短句를 섞어가며 두 구씩 서로 정연하게 대를 이루는 병려문騈儷文으로서 그 수사修辭가 매우 화려하다. 이렇게 지어진 상량문은 그 집의 들보 위에 안치하고 더러는 판각하여 게시하기도 했다.
해인사 대웅전은 창건 이래 여러 차례 중건된 일이 있는데, 특히 1817년(순조 17)에 화재로 소실된 후 중건할 때는 사뭇 특별한 사연이 있다. 대웅전 중건에 있어 해인사에서는 상량문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에게 부탁했는데, 추사는 이에 응하여 스스로 상량문을 지었을 뿐 아니라 또한 감청색 견본絹本에 금니金泥로써 한 점 한 획 정성을 다하여 자필로 써서 보냈다. 때는 1818년(순조 18) 6월로서 추사의 나이 33세 되던 해였다.
추사의 상량문 글씨는 작년에 비로소 해인사성보박물관 개관과 함께 전시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이 글씨는 단정한 해서체로서 추사의 노년 작품에 비한다면 다소 골기骨氣가 약한 편이나 추사의 젊은 시절 진적眞蹟을 감상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이제 그 옛적 상량식을 행했던 유월이 다시 다가왔다. 추사가 당시에 상량문을 마무리하면서 종종種種의 여러 색상色相이 모두 이곳 가야산 해인사에서 나타나기를 기원한 바 있는데,
그것은 곧 광명해光明海요 그것은 곧 반야해般若海요
그것은 곧 청정해淸淨海요 그것은 곧 묘법해妙法海요
그것은 곧 원각인圓覺印이요 그것은 곧 수능인首楞印이요
그것은 곧 금강인金剛印이요 그것은 곧 법화인法華印이니
길이 이 경계境界에 머물러 이 해海에서 이 인印으로
라고 하였다. 그 기원은 당시에 그칠 뿐만이 아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이르도록 해인사의 존재와 함께 영구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