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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누구요? 모르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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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야기 그림이야기 - 설곡 2003년 06월 256호
선화 너의 마음을 가져온다면 내가 편안하게 해주겠다
중국에 온 달마는 자신의 법을 이어갈 사람을 여러 곳에서 찾았지만 만나지 못했다. 황제를 만나고 주지를 만나고 비구니도 만나보았다. 그러나 만나본 모든 이들과는 기연機緣이 맞지 않았다.
양梁나라의 무제武帝는 자신과 대화하던 달마에게 물었다.
“짐朕을 상대하는 그대는 누구요?”
“모르겠노라(不識).”
무제는 달마가 외마디로 던진 ‘알지 못함’이라는 말을 참으로 알지 못했다. 달마의 이 ‘알지 못함’이라는 말은 이미 알고 모르고를 초월한 것이었다. 무제가 불사는 많이 했지만 사물을 보는 눈은 아직 분별의 경계에 머물러 있음을 알고 달마는 그를 떠났다.
마침내 숭산 소림사로 은거한 달마는 9년을 면벽面壁하며 인연 있는 제자를 기다렸다. 어느 눈 내린 겨울날, 진리에 목마른 구도자가 굴 앞에 서 있었다. 달마를 애타게 찾아 헤매던 신광神光이었다. 신광은 선 채로 눈 속에서 밤낮 삼일을 요지부동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왼팔을 끊어 백설 위에 선혈을 뿌려보임으로써 스승을 향해 법을 구하는 신심을 드러내보였다. 달마는 그가 법기法器임을 간파하고 그를 제자로 맞았다.

신광은 마음이 불안했다. 어떻게 안심입명安心立命 하는가를 여쭈었다.
“스승님 마음이 불안합니다. 저의 마음을 안심케 하여주십시오.”
“너의 마음을 내 앞에 가져오너라. 내가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하리라.”
“스승님! 아무리 마음을 찾아보아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느니라.”

신광은 자신의 마음을 찾아보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내 앞에 가져오라는 스승의 말씀에는 자신의 마음을 내어놓을 수가 없었다.
“내 이미 그대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느니라”하는 그 순간, 신광의 마음은 열렸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순간, 그토록 헤매던 안심입명의 자리가 자신이 앉은 바로 그 자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마는 신광이 마음의 눈이 열렸다는 것을 감지했다. 부처님의 법을 전해줄 수 있는 제자를 만난 것이 기뻤다. 신광은 스승에게 깨달음을 인가받고 혜가慧可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가사와 발우를 전수 받은 제자가 되었다.
그렇다. 선은 알 수 없는 그곳, 몰라도 철저히 모르는 그 곳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앎이 있다면 이미 선이 아니다. 달마의 ‘알지 못함’이나 신광의 ‘알 수 없음’이야말로 선의 세계로 들어서는 첫걸음인 것이다.

쓰다 남은 먹을 이용하여 아무런 의도 없이 여흥으로 그리다
바창무시(法常牧谿)의 이 달마도는 종이에 먹으로 그린 그림으로 현재 일본 오사카 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이다. 높이 95.2cm 폭 33.6cm의 이 그림은 단조로운 한두 가지의 먹색으로 처리된 작품이지만 농담濃淡과 건습乾濕을 원숙하게 처리한 탁월한 작품이다.
몇 번의 간단한 붓놀림으로 달마의 외부조형은 물론 인물의 개성과 특질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마른 붓과 머뭇거림 없는 손놀림은 작가가 심중에 그리고 있는 달마의 정신을 특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동시에 그의 손놀림이나 화면의 구성은 화가가 폐부로부터 무엇인가를 일순간에 쏟아내는 듯한 통쾌한 동작으로 이루진 것임을 알게 한다. 이 그림은 마치 선사의 돈오頓悟처럼 일순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 치의 오차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가 선화의 대가라는 것을 알게 한다.
바창무시의 회화 세계는 그리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주제에 제한이 없다. 부처, 보살, 달마, 한산습득, 포대화상 등 인물들과 원숭이, 용, 호랑이, 학, 기러기 등 동물들과 감, 채소 등 화조에 이르기까지 그리지 않은 것이 없다. 특히 그는 산수화의 대가로서 배경을 산수로 처리한 인물화가 많다. 그러나 이 달마도는 그러한 인물화와는 달리 주체만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구도를 사용했다. 배경을 완전히 비워둠으로써 무한無限의 여유를 느끼게 하고, 동시에 주체를 강렬하게 드러내는 화법으로써 선화의 간결한 느낌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그렸을 노자상老子像 역시 같은 화법을 사용한 그림이다. 감필減筆과 파필破筆을 자유분방하게 사용했으며, 먹도 윤택하고 젖은 것이 아니라 쓰다 남은 마른 먹(枯墨)을 썼다.
이러한 고묵, 파필, 감필법은 그가 전업화가이면서도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쓰다 남은 먹을 이용하여 아무런 집착 없이 여흥으로 가볍게 그린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점들이 이 그림으로 하여금 선화일 수밖에 없다는 느낌을 주도록 만들고 있다.
바창무시의 그림은 수식이나 장식을 도외시하는 간단명료한 필법을 쓰지만 심오한 의미를 함축한다. 그러나 그의 필법은 간명하면서도 힘이 있고 은근하면서도 품은 뜻을 충분히 화면에 옮겨낸다. 윤곽이 단순하여 번잡하지 않으면서도 신비로운 느낌과 기운이 화면에 흘러넘친다.
그의 달마도는 붓과 먹이 서로 생동하는 기운을 연출하고, 손과 형상이 둘이 아닌 경지를 느끼게 한다. 또한 노자상은 필(筆線)이 자연스럽고 청정한 감을 주며 여백은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준다. 그의 그림은 간결함과 여유로움, 그리고 솟구치는 기품과 자유로움이 넘치며, 담박하고 은근한 멋이 신비롭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