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마음은 물질로 채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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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의 부처 - 장휘옥
1995년 04월 158호
언제부터인가 ‘중년의 위기ꡑ라는 말이 우리에게 익숙해졌다. 내가 이 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십 년 전 어느 대중잡지에서 ‘중년의 위기ꡑ를 다룬 실화를 읽고 나서부터였다. 정확한 제목이나 내용은 기억에 없지만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회사의 중견 간부가 어느날 갑자기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사십대 후반으로 회사에서
는 유능한 인재이고,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이들의 인자한 아버지로써, ‘성실’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는 삶을 살아 온 사람이었다. 그의 부인은 결혼해서 이십여 년을 살아 오는 동안 오직 회사와 집밖에 모르던 남편이 가출하리하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고, 또 남에게 원한을 산 일도 없기 때문에 도무지 실종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경찰에 신고도 하고 찾아볼 만한 곳은 다 찾아 보았으나 헛일이었다. 부인은 마지막 수단으로 전국의 절을 찾아다녔다. 이렇게 남편을 찾아 헤매기 십 년, 어느날 친구가 찾아와 모 절에서 땔나무 하는 부목負木을 한 사람 보았는데 부인의 남편과 꼭 닮았더라는 것이다. 서둘러 찾아가 보니 정말 자기 남편이었다. 부인은 남편의 손을 붙잡고 울며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남편은이대로가 좋다면서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가출 이유는, 어느날 문득 자신이 사십대 후반임을 깨닫자 그 때까지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삶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고, 자신을 위해 무엇을 했으며,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지, 앞으로 이대로 살아야 하는지 하는 문제들로 주체할 수 없는 마음에 안절부절하다 무작정 집을 나와 공사장 품팔이도하고 거지 행세도 하며 전국을 떠돌아 다니다 결국 절에서 나무하고 불때는 부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에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
았다. 그런데 그런 정신적 위기가 내 주변, 그것도 내 친구에게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일 년 전쯤 길에서 우연히 국민학교 때 친구를 만났다. 반가웠지만 서로 바빠 전화번호만
주고받고 헤어졌다. 그뒤 전화로 안부만 묻고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전 그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차 한 잔 하자는 것이었지만 목소리가 우울했다. 만나자마자 대뜸 왜 사는지 모르겠다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시간만 나면 성당에 나가 봉사활동을 한다고 했기 때문에 참으로 뜻밖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부잣집에 시집갔으나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 재기하기까지 정말 바쁘게 살았다고 한다. 이젠 남들만큼 살고, 중학생인 아들은 바이올린을 전공시키고 국민학교 육학년인 딸은 피아노를 전공시킨 것으로 미루어보아 꽤 잘 사는 듯했다. 그런데 그에게 얼마전부터 불안초조 증세가 생겼다는 것이다. 갑자기 누구를 위해 살아왔으며,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남편과 자식이 귀찮아지고, 남편이 “당신이 뭘 알아” 하며 툭 던지는 소리나 아이들이 “엄마는 몰라도 돼요” 하는 소리들이 얼마 전까지는 예사롭게 들렸는데 지금은 모두 자기를 무시하고 바보 취급을 하는 것 같아 화가 나고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때때로 걷잡을 수 없는 공허함과 불안감이 자신을 엄습할 때는 참고 싶은 생각뿐이라고 했다.
중년이면 인생에 대해 웬만큼 안다고 할 수 있는 나이이다. ‘중년의 위기’는 바로 인생의 최 정점에서 맞이하는 고비이다.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문제이다. 중년의 위기를 넘기는 데 너무 큰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친구의 안쓰러운 모습에 방관자 밖에 될 수 없는 내가 안타까웠다.
옛날에 비해 요즘은 물질적으로 훨씬 풍부하고 살기 좋은데도, 정신적으로는 옛 사람들보다 불행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드라마나 좌담 프로에서 중년의 정신적 위기를 다루는 일이 부쩍 많이 졌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정신적 위기의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생활이 안정되고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거의 없는 사림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국 정신적 공허함은 물질로 채워지지 않음을 말해 주는 단적인 증거가 아닐까.
석가모니가 탄생한 날, 아지타 선인이라는 한 점성가가 어린 태자의 얼굴을 보고, 온 천하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아니면 출가 수행자가 되어 진리를 깨닫는 대 성인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부왕은 태자가 출가 수행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성가의 말을 들은 뒤로는 꿈에라도 출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태자를 즐겁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외국에서 수입한 비단 옷을 입히고, 철마다 옮겨다니며 놀 수 있는 궁전을 지어 태자를 세속의 즐거움에 빠지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태자는 조금도 즐거워 하지 않았다. 출가하기 전날 밤, 연회가 끝난 뒤 술에 취해 흐트러져 자고 있는 시녀들의 모습에서 그는 오히려 추함을 느꼈다고 한다. 태자는 세속적인 환락을 즐거워하기보다는 오히려 공허해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러 석가모니는 왜 호화로운 생활을 두고 출가했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인간의 공허한 마음은 물질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군중 속의 고독’ 이란 말도 있듯이, 뭔지 모르게 마음이 허전하고 공허할 때 옆에 수백 명, 수천 명의 사람이 있으면 뭘 하고, 수많은 금은보화가 있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태자는 결국 스물 아홉 살의 나이로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그는 먼저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리하(왕사성)로 가 그 무렵 유명한 전통적인 요가의 두 선인을 차례로 방문하여 선정(禪定)에 관한 가르침을 받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다시 가야 지방의 교외-지금의 붓다가야-에 있는 네란자라 강 근처에서 옛부터 바라문들 사이에 초월적인 힘을 얻는 수행의 수단으로 널리 쓰이던, 단식을 포함한 고행을 육 년 동안 계속했다. 그러나 심신의 쇠약으로 기력을 잃어 해탈을 얻지 못한 채 고행을 포기했다. 태자는 마을로 내려와 그 마을 처녀가 주는 우유죽을 먹고 기력을 회복한 뒤, 근처의 아슈밧다 나무(無花果樹 : 뒤에 깨달음이라는 뜻의 보리(苦提)를 따서 보리수라 함) 아래서 흘로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얻어 드디어 부처가 되었다. 이것을 성도(成道)라 한다. 온 인류를 정신적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묘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의 나이 서른다섯살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