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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미묘한 참회법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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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혜총 2003년 05월 255호
“세월이 지나가 어느새 하루가 흐르고 한 달이 되며, 한 달 두 달이 문득 한 해가 되고, 한 해 두 해가 바뀌어 어느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다. …… 이 어찌 급하고 급하지 않은가.”
원효 스님께서 일찍이 초심자를 위해 <발심수행장>에 보이신 이 말씀을 떠올리면, 그 옛날 열한 살 철없던 어린 나이에 부모의 슬하를 떠나 자운 큰스님을 아버지처럼 따르며 은혜를 입었던 그 시절이 어제처럼 추억된다.
살아가면서 이제 살 날보다 지난 세월이 길게 느껴질수록 ‘이 어찌 급하고 급하지 않은가’ 하시는 원효 스님의 간절한 당부가 뼛속 깊이 느껴지지만 열한 살의 나이는 그 간절함을 알기에는 너무나 천진난만한 시절이었다.
타고난 운명이 속가에서 살면 서른 살을 넘기지 못할 관상을 타고났다고 하니, 그 말을 듣고 그냥 자식을 가만히 내버려둘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절에 살면 단명의 운세를 타고 넘을 수 있다는 말에 애끓는 부모의 가슴을 뒤로 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 동진출가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절은 나의 요절운을 돌려서 새로운 삶을 약속해준 은혜와 감사의 보금자리였다.
그렇게 내맡겨지다시피한 불가에의 입문이었지만 절에 들어서니 그렇듯 좋을 수가 없었다. 전생의 고향을 찾은 것처럼 그렇게 마음이 편안했고 또 스님의 모습과 승복이 너무나 좋았다. 나도 빨리 승복을 입었으면 하는 마음이 앞섰다. 절에 맡겨졌다기보다 운명이 나에게 스스로 절을 찾게 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성싶다.
학생복을 입고 통도사를 찾았을 때 자운 큰스님은 ‘잘 왔다.’하시면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나의 행자시절은 그로부터 여느 행자처럼 어른 스님을 모시고 방 닦고, 빨래하고, 나무하면서 조석예불과 ‘화엄경 약찬게’를 외우는 일과로 시작되었다. 때로는 뒷산에 가서 송이를 따서 호박잎에 곱게 싸서 잿불에 구워 뜨끈뜨끈한 것을 스님께 드리면 스님은 맛있게 잘 드셨다. 스님께서 맛있게 잡수시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또 왕대나무를 잘라서 천일염을 넣고 황토를 발라 봉하여 아홉 번을 구워 죽염을 만들어 큰스님 양치하시도록 해드리고, 공양 후에는 차를 달여 드리는 건 기본이었다. 이렇게 자운 큰스님을 비롯해 구하 노스님 등 덕 높은 스님들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나는 따뜻한 사랑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천성이 그런지 장난도 심했다. 그때만 해도 세월이 궁핍할 때이다 보니 콩서리, 보리서리, 밀서리, 감 따먹기는 예사였고, 산 목숨 소중한 줄도 모르니 사리탑 뒤의 까치새끼를 잡는 등 장난도 여러 가지였다.
그런데 어린 행자를 슬프게 한 일이 있었다. 대중공양 후 발우를 걷고 나면 대중을 훈계하는데 당시 총무 소임을 사셨던 영암 스님은 꼭 ‘혜총이 어떻고…’ 하면서 대중을 함께 꾸짖었는데 어린 마음에 그 점이 너무 억울하고 속이 상해서 영암 큰스님을 찾아가 울면서 항변하니까, 스님은 ‘야! 이녀석아 네 이름을 부르면서 대중을 훈계해야지. 네가 크면 그 뜻을 알게 될거다.’ 하시면서 달래주었다.
행자시절은 매일매일 계속되는 일상의 일들이 모두 느낄 것, 배울 것이었다. 당시 구하 스님은 일흔이 넘으셨고 자운 스님은 마흔셋이었는데 아침마다 구하 노스님께서 젊은 자운 스님을 찾아와 문안인사를 드리는데 나는 그것이 너무도 궁금했다.
“노스님! 노스님께서는 왜 젊은 스님에게 늘상 문안인사를 드리러 오십니까?”
구하 노스님께서는 웃으시면서 그 까닭을 말씀하셨다.
“나의 은사스님께서 열반하시기 전에 ‘이러이러한 스님이 오면 너의 스승으로 믿고 섬겨라’ 하는 유언을 하셨는데, 자운 스님이 바로 그 스님이라 이렇게 은사스님으로 모시는 것이란다.”라고 하셨다.
구하 스님과 자운 스님의 인연을 통해 나는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도반이나 이웃하는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더욱 자주 구하 노스님을 찾아가 손과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힘껏 발바닥을 문질러드렸다. 노스님의 거친 발바닥을 어린 손으로 꾹꾹 눌러드리면서, 그리고 자운 큰스님의 팔을 베고 잠이 들면서 그렇게 뜨거운 사랑 속에 성장했다.
이 어릴 때의 사랑이 얼마나 오늘날 소중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사랑 속에 자라지 못하면 메마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자운 큰스님은 나에게 엄부자모의 모습을 두루 보이시며 출격대장부로 키워주셨다. 그 은혜 다 갚지 못함에 한스러울 뿐이다.
스님은 나를 한 사람의 수행자로 키우기 위해 생활 속에서 세심한 배려를 하셨다. 나는 자운 스님께 《초발심자경문》과 《사미율의》를 배웠고 차츰 절집의 사람이 되어 갔다. 경전을 읽을 때에도 자운 스님의 음성을 그대로 따라했기에 대중들은 ‘제 2 자운’,‘작은 자운 스님’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때로 경전 읽는 소리를 듣고 잘못 읽는 부분이 있으면 지나가던 홍경 대강백 스님이 고쳐주셨는데, 어린 나이에 책도 안 보고 듣기만 하고 바로 틀린 곳을 고쳐주시는 스님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자운 노장님의 크신 가르침 중에 참회보다 더 큰 가르침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승려로서 첫발을 들여놓고 보살계와 삼귀의계를 받기 전에 나는 삼천배 참회의식을 치렀다.
“스님이 되려고 마음먹었으면 부처님전에 삼천배를 하거라!”
어린 나이에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당돌하게 말씀드렸다.
“어린 나이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참회를 하라고 하십니까?”
아마 큰스님께서도 어이가 없으셨겠지만, ‘네가 커보면 알게 될 테니 시키는 대로 참회나 하거라.’ 하셨다. 그렇게 해서 나는 통도사 적멸보궁에서 꼬박 9시간 동안 삼천배를 하고 새벽에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왜 참회를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은 이후로 나에게 화두가 되었다. 그리고 승려로서 살아가야 할 방향이 되었다.
나는 참으로 큰 복을 만나 선지식의 가르침을 따라서 참회의 인연을 맺었다. 자운 큰스님은 어린 행자가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참회로써 과거에 지은 업장을 녹여주신 것이다. 어릴 적에 메뚜기를 잡아 구워먹고, 시냇가에서 가재를 잡고, 잠자리를 잡아 꼬리를 자르고 긴 풀대를 끼워 날리면서 손뼉을 치고 좋아했던 그 천진함이 지금 내가 그때의 메뚜기와 가재와 잠자리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바로 죽음의 고통을 저지른 것이니 그 죄업이 얼마나 지중한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생각이 든다.
자운 큰스님께서 보이신 참회의 법문은 그 이후 스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참회를 지성껏 해나가면 세상 천지만물이 모두 나와 한 몸임을 알게 된다.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고 남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지혜의 눈이 열린다.
행자시절 자운 큰스님을 비롯한 여러 큰스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지극한 사랑도 지금 생각해보면 깊고 깊은 미묘한 참회법문이었다. 어린 행자가 세상에 나아가 대중을 이익되게 할 수 있는 올바른 스님이 될 수 있도록 아끼고 보살펴주신 큰 뜻을 새겨서 여생 동안이라도 그 은혜 갚도록 길을 닦아가리라 다짐해본다.□